컨텐츠 바로가기

04.28 (일)

[ESSAY] 자식놈 쓸모없다 생각했는데… 친구 아기 보다가 눈물이 터졌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자식새끼 낳아봤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나 비록 쓸모없는 자식이기는 하지만 부모의 고언을 무시하는 불효를 저지를 수는 없기에 결혼은 하더라도 아이는 낳지 않기로 결심했다. 여기에 더해, 낳아 달라고 하지도 않은 아이를 내 멋대로 태어나게 해 온갖 번뇌를 겪게 할 권리가 나에게는 없다는 생각도 한몫했다. 이십대의 어느 날, 직장 동료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꺼내놓자 그녀는 격앙된 목소리로 대꾸했다. “자식이 행복할 수도 있는데 왜 그 기회를 뺏어? 네 자식도 인생을 살아갈 권리가 있어!” 이게 웬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었다.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생명체가 생존권을 주장하고 말고 할 일이 무어 있단 말인가. 너의 밑도 끝도 없는 낙관으로 낳은 자식이 불행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는 염려는 해본 적 없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말을 섞어봤자 피곤해질 것이 분명했기에 대충 웃어넘겼다. 그녀와 적당한 거리를 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직장 내에 동갑내기가 그녀 하나뿐이었던지라 시나브로 가까워지게 되었다.

조선일보

/일러스트=박상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성향이 달라도 너무나 다른 우리는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토론을 벌이기에 바빴다. 가장 뜨거운 주제는 단연 결혼과 출산이었다. 그녀는 힘닿는 데까지 아이를 낳아 축구팀을 만들고 싶다는 야심 찬 포부를 밝혔다. 그 아이들과 단칸방에서 복작복작 살아도 좋으니 사람 냄새 나게 울고 웃으며 지내고 싶다나 뭐라나. 나는 격렬히 반박했다. 과연 네 자식도 단칸방을 좋아하겠냐고, 좁디 좁은 집에 축구팀이 들어차면 복작복작 사는 게 아니라 북적북적 부대끼는 거 아니냐고, 그놈의 사람 냄새는 꼭 울고 웃어야 풍기는 것이냐고, 우리 그냥 웃으며 살면 안 되겠냐고. 끝을 모르고 이어지던 설전은 그녀가 결혼함과 동시에 잦아들기 시작하더니만 임신을 하면서는 완전히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배 속에 아이를 품은 그녀 앞에서 자식을 낳아서는 안 되는 101가지 이유 따위를 소리 높여 주장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녀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러나 ‘다른 때도 아닌 이 혼돈의 시대에 아이를 낳는 일이 과연 옳은가’ 하는 의문은 그녀의 배가 불러옴에 따라 점점 커져만 갔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그녀의 아이가 세상에 출두하기로 약속된 날이 다가왔다. 이른 아침, 병원으로 바삐 향하고 있을 그녀에게 진심이 가득 담긴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순산 기원!’ 그간의 우려가 은연중에 전달되기라도 한 것일까? 그녀는 ‘육이오 전쟁 통에서도 다들 아기는 낳았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답장을 남긴 채 분만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반가운 동영상 하나가 도착했다. 그 누가 아이는 응애응애 운다 하였는가. 그녀의 딸은 “으아아악! 으아아악! 으악! 악!” 힘차게 포효하며 자신의 존재를 온 천하에 알렸다. 열 달 만에 뚝딱 사람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마냥 철부지 같기만 한 친구가 어엿한 엄마가 되었다는 현실이, 그녀와 그녀 남편을 반반 섞어 놓은 아기의 얼굴이 너무나 신기하고 또 기특해서 동영상을 거듭 재생했다. 새로운 생명 앞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녀의 딸이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는 것. 내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그뿐이었다.

고 쪼끄마한 손이며 발을 만져보러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리할 수 없었다. 엄마인 그녀도 제 아기를 아직 품에 안아보지 못했단다. 퇴원하는 날까지 유리창 너머로만 아기를 바라봐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신세라 하였다. 하는 수 없이 영상 통화로 아쉬움을 달랬다. 세상이 이러하거나 말거나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쌔근쌔근 단잠을 자는 아기의 얼굴을 보자 주책맞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코를 훌쩍이며 소맷부리로 눈물을 훔쳐내는 나에게 그녀가 이죽거렸다. “너도 출산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 나는 죽어도 아기 안 낳을 거야, 하면서 스스로의 한계를 정하지 말라고. 너한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니까?” 논객이 돌아왔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둘이 되어. 지금은 옹알이밖에 하지 못하는 저 녀석이 앞으로는 제 엄마와 편을 먹고서 나를 실컷 깔아뭉개겠지? 똑 닮은 두 여자가 나를 향해 따지고 드는 모습을 상상하니 배시시 웃음이 샜다. 잠깐, 나 지금 울고 웃은 거야? 그러니까 이게 바로 사람 냄새인 거야? 인정, 내가 졌다.

[이주윤 작가]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