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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굳건하던 대학서열, 파괴의 시간이 왔다 [Big Pi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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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미국에서 1636년 하버드대가 설립되면서 시작한 제1의 물결에 이어, 독립 후 1785년 조지아대, 1819년 버지니아대 등 각 주에서 주립대가 설립되는 제2의 물결, 농업과 공업을 지원하는 코넬대, MIT(매사추세츠공대) 등을 위해 정부가 토지를 제공한 모릴법으로 촉발된 제3의 물결, 그리고 1876년 존스홉킨스대가 설립되면서 시작된 연구대학의 제4의 물결 등을 통해 미국은 세계 최고 대학 시스템을 구축하게 됐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하버드대는 1869년부터 무려 40년 동안 총장을 역임한 찰스 엘리엇의 리더십 등에 힘입어 세계 최고 연구대학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후 150년 동안 세계 모든 대학이 하버드대를 정점으로 하는 서열 체계에 편입돼 하버드대를 따라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하버드대 모델은 연구와 교육의 수월성을 유지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의 입학을 거부해야 하는 치명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2020년 하버드대는 지원자 중 단지 4.3%의 학생에게만 입학을 허가했다. 하버드대 모델의 가장 큰 취약점인 연구 수월성과 교육 기회 확대 간에 존재하는 상충 관계를 극복할 수 없을까? 연구와 교육의 수월성을 유지하면서도 훨씬 더 많은 학생에게 좋은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새로운 대학 모델은 없을까? ASU를 시작으로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는 대학이 하나둘 등장하면서 하버드대의 한계를 극복하는 제5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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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하버드대 시대가 막을 내린다는 소식은 우리에게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그동안 우리 교육에서 학생과 학부모를 고통스럽게 했던 치열한 입시 경쟁의 뿌리가 소위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로 대표되는 명문대의 바늘구멍 같은 입학 기회에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SKY 시대도 정부의 강압적인 평준화 정책에 의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대학 모형을 추구하는 자율적인 노력에 의해 막을 내릴까? 미국 고등교육에서 일어나는 제5의 물결 특징에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제5의 물결은 고등교육에서 그동안 폭넓게 일어난 많은 변화가 모여 만들어진다. 2012년 무크(MOOC·공개 온라인 강좌) 버블은 이러한 측면에서 시사점이 크다. 뉴욕타임스의 토머스 프리드먼은 무크가 대학교육의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고 격찬했으나 곧바로 버블이 꺼지는 참담한 위기를 겪었다. 하버드대나 스탠퍼드대 교수의 유명 강의를 누구나 들을 수 있게 한다는 혁명적 아이디어는 무크를 수강하는 많은 학생이 끝까지 수업을 이수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실망감만 안겨 줬다. 전문가들은 무크의 버블 붕괴 이유를 △능동적 학습과 학생 중심의 수업 설계에 관한 학습과학 △대학의 LMS(학습관리체제) △온라인 교육의 발전 △교수학습지원센터(CTL)와 같은 대학의 학습 혁신 조직 등 미국 대학에서 그동안 이뤄진 혁신 결과들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어떻든 무크 버블은 미국 대학들이 어떻게 가르칠지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학습 혁신에 큰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고 결과적으로 2012년은 미국 대학교육 변화의 변곡점이 돼 이후 7년간 대학교육의 변화가 이전 70년의 변화보다도 훨씬 더 컸다고 한다. 무크도 버블 이후 학습과학의 원칙을 적용하고 LMS와 온라인 교육 기법들을 활용하며 대학의 교수학습지원센터와 협력하면서 2016년 700개 대학에서 학생 5800만명이 수강할 정도로 다시 활성화되고 있다.

둘째, ASU가 제5의 물결 기수가 된 것은 에듀테크 기업을 끌어들여 협업하면서 150가지가 넘는 디지털 도구와 서비스를 활용해 모든 학생이 개개인의 학력 수준이나 학습 속도에 맞는 맞춤학습(Adaptive learning)을 할 수 있도록 하고 더 나아가 프로젝트 학습 같은 능동학습(Active learning)과 성공적으로 결합했기 때문이다. ASU는 맞춤학습 코스웨어를 1학년 수학, 화학, 생물 등 기초과목에 활용해 효과를 보자 이를 확대해 현재 매년 2만명의 학생이 이용하고 있다. 향후 과목을 75개로 늘려 학부 학생의 75%가 활용하도록 할 예정이다. 이러한 혁신 결과 ASU는 2002년부터 2019년까지 학생 수를 5만5000명에서 12만명까지 늘리면서 가족 중에서 최초로 대학생이 된 학생 수도 7560명에서 2만3583명까지 증가했다. 다양한 계층에 골고루 대학교육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동시에 ASU는 기존 학과와 학문 구분이 주요한 사회문제나 미래 과제를 해결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는 인식 아래 지질학과와 천문학과를 융합해 '우주탐사학부(School of Earth and Space Exploration)'를 설립하고, 생물학, 인류학, 사회학, 지질학 등의 학자들이 모여 '인간진화와 사회변화 학부(School of Human Evolution and Social Change)'를 설립한 사례도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혁신을 통해 연구 예산이 2002년 1억2000만달러에서 2019년 6억달러 수준으로 5배나 늘어났다. 결국 ASU는 하버드대가 하지 못한 연구의 수월성과 교육 기회 확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셋째, 제5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는 퍼듀대 사례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 인디애나주의 명문 주립대인 퍼듀대는 2017년 영리 온라인 대학인 캐플런대를 인수·합병했다. 이를 통해 퍼듀대는 미국 전역에 흩어진 15개의 캐플런대 시설을 활용해 늘어난 3만명의 학생에게 맞춤형 온라인 교육 기회를 제공하게 됐다. 퍼듀대는 기존 수월성 교육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학생 3만명에게 양질의 온라인 교육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퍼듀 글로벌'이라는 별도 조직을 설립해 기존 퍼듀대와는 분리된 재정 구조를 갖췄다. 혹시라도 캐플런대와의 인수·합병이 실패로 끝나더라도 기존 퍼듀대 학생들에게 불이익이 돌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럼 과연 우리나라에도 제5의 물결과 같은 변화가 일어나면서 SKY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될까? 미국에서 하버드대 시대가 막을 내리니 한국에서도 당연히 SKY 시대가 끝날 것이라고 쉽게 유추할 수는 없다. 우리와 미국의 차이점을 따져보자. 첫째, 미국에서 2012년의 무크 버블이 대학으로 하여금 어떻게 가르칠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든 학습 혁신의 변곡점이었다면 우리는 2020년 코로나19가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코로나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사이버대를 제외하고는 대학에서 온라인 학습을 비롯해 새로운 형태의 수업이 거의 시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는 백년 넘게 대학의 유일한 교육 방식이었던 교실 대면수업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못하게 만들면서 교육 방식의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2015년 조사를 보더라도 미국은 이미 학생 30%가량이 하나 이상의 온라인 수업에 등록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온라인 수업 효과에 대해 연구한 논문의 92%가 대면수업에 비해 효과적이거나 대등하다는 실증 근거를 제시했다고 한다. 반면에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 모든 대학에서 새로운 수업 방식을 도입하고 효과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갑자기 시작하게 됐다. 이러한 수업 방식 변화가 대학교육의 수월성과 교육 기회 확대 간 상충 관계를 극복하게 해 SKY 시대의 막을 내리는 것까지 이어질지 아직까지는 불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우리 대학은 미국 대학과는 달리 저출산의 직격탄을 맞았다. 2000년까지도 75만명이었던 한 해 고교 졸업생 수가 2023년에는 40만명으로 격감하면서 문을 닫는 대학이 속출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학생들의 수도권 대학 선호가 강한 상황에서 지방 사립대는 학생을 충원하지 못하는 심각한 위기가 닥치고 있다. 그러나 위기는 동시에 기회다. 학생 충원 위기에 처한 대학은 해외 학생을 더 많이 충원하거나 평생학습자 교육에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별로 없다. 대학이 평생학습자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고 해외 학생을 늘리려면 대학 스스로 '파괴적 혁신'에 나서야 한다. 대학의 파괴적 혁신은 새로운 대상을 개척하면서 완전히 새롭게 가르치는 것이다.

대학이 기존에 가르치던 내용과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는 확대 재생산만으로 평생학습자와 해외 학생을 제대로 교육할 수 있을까? 평생학습자와 해외 학생에게 통하는 혁신 교육을 하는 대학이 나오고 국내 기존 학생에게도 선택받으면서 낡은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대학을 추월하는 파괴적 혁신이야말로 SKY가 정점에 있는 대학 서열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

마지막으로, 코로나 이후 교육의 지각변동에서 결정적 게임 체인저는 인공지능(AI) 개인교사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ASU가 활용하는 맞춤학습 코스웨어 중 수학 과목의 ALEKS와 같이 AI 개인교사도 있지만 아직까지 빅데이터를 활용한 학습 분석과 AI 개인교사는 막 싹트는 분야다. 그만큼 우리 대학과 에듀테크 기업이 선두로 치고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만약 우리 대학들이 AI 개인교사를 활용해 학생에게 맞춤학습 기회를 제공하고 교수의 부담을 줄여주는 대신 교수는 인간적 연결을 강화해 사회정서적 학습과 보다 인간적이고 고차원적인 역량을 키울 수 있는 프로젝트 학습 등에 집중하는 하이터치 하이테크 교육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다면 SKY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대학 시대가 열릴 것이다.

하버드대 시대가 가고 고등교육의 새 시대가 열리고 있다. 세계 대학 서열 정점에 있는 하버드대가 무너질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학들이 하버드대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대학 모델을 추구하면서 대학 서열 체계 자체가 퇴색하는 시대가 시작됐다. 마이클 크로 애리조나주립대(ASU) 총장은 하버드대와는 전혀 다른 ASU 모델을 제시하고 실천한 지난 18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5의 물결'이라는 책을 2020년 출간했다. 그는 미국 고등교육에서 ASU를 필두로 하버드대의 한계를 극복하는 제5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고 썼다. ASU는 (하버드대와 같이) 얼마나 많은 학생을 배제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학생을 포용해 성공시키느냐로 평가받겠다는 것을 학교 미션으로 내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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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호 아시아교육협회 이사장·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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