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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포퓰리스트들의 달콤한 약속은 쓴 현실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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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나경원 국민의힘 전 의원, 오세훈 전 서울시장 /사진=국회사진기자단, 김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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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국지로 보는 사람경영-52] 서울시와 부산시 보궐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벌써부터 선심성 공약들이 마구 쏟아지고 있습니다. 언론에서도 '포퓰리즘'이라는 단어가 점차 많이 쓰이고 있죠. 물론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공약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성이 떨어지는 정책은 십중팔구 포퓰리즘 공약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제는 포퓰리즘을 내세워 정권을 잡는 정치인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전 세계 사람들을 괴롭히고 독일 국민을 파멸로 몰아넣은 아돌프 히틀러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지 않았습니다. 정식 선거를 통해 집권했고 한때는 수렁에 빠진 독일을 구원할 영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가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민이 원하는 것을 약속하고 일부는 실행에 옮겼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일으킨 것도 포퓰리즘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수단이 정당치 못하면 탈이 나게 마련입니다. 히틀러는 의도마저 불순하고 난폭했습니다. 그 결과 인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포퓰리스트의 달콤한 약속이 쓰디쓴 현실로 돌아온다는 사실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중국 춘추시대에도 포퓰리즘으로 정권을 잡은 지도자가 많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송문공과 제의공이 대표적입니다. 송문공은 외모가 출중한 인물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패자를 꿈꾸다가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참패했던 송양공입니다. 그는 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제후가 되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권력에 대한 욕심이 강했습니다. 정권 찬탈을 위해 그가 선택했던 전략이 바로 포퓰리즘이었습니다. 그는 이미지 정치에 몰두했습니다. 멋진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고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곤궁에 처했을 때는 재물을 풀었습니다. 노인들에게 매달 곡식과 비단을 보냈고 사람을 보내 문안했습니다. 재주나 기술이 있는 사람들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이런 포퓰리즘 전략은 서서히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사람들은 군주인 송소공보다 그를 더 좋아했습니다. 그가 군주가 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권좌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송양공의 부인 왕희였습니다. 왕희는 늙었지만 혈기왕성한 여인이었습니다. 송문공의 포퓰리즘 정책을 도왔을 뿐 아니라 송소공의 반대파를 결집했습니다. 정권 교체 시기가 무르익자 측근을 시켜 사냥에 나간 송소공을 살해합니다.

이로써 송문공의 포퓰리즘과 은밀한 모략은 정권 탈취라는 최후의 목적을 달성합니다. 그러나 군주의 자리에 오른 뒤 송문공의 치적은 보잘 게 없었습니다. 22년 재위 기간 동안 주변 국가들의 간섭과 침략에 시달리기만 했죠.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지도 못했고 백성의 편안한 삶도 보장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의공 상인은 송문공보다 더 겉과 속이 다른 포퓰리스트였습니다. 그는 춘추시대 첫 패자였던 제환공의 아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 역시 적장자가 아니었기에 군주가 될 가능성은 낮았습니다. 하지만 권력에 대한 욕망은 누구보다 강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복형인 제소공은 그를 융숭하게 대우했습니다. 반역할 빌미를 주지 않았던 것이죠. 더욱이 소공 말년에는 또 다른 형제인 공자 원이 국정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백성들에게 인기가 좋았습니다.

소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전 재산을 풀어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했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을 도왔습니다. 선행으로 백성들의 인기를 끌면서 동시에 자객을 모았습니다. 소공의 후계자인 세자 사를 죽인 사람도 그가 키운 자객이었습니다. 거사를 끝내고 그는 모든 책임을 이복형인 공자 원에게 돌립니다. "세자 사는 군주가 될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형님 때문에 거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공자 원은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욕심 많은 동생의 속셈을 훤히 알고 있었던 겁니다. 탐욕이 많은 제의공과 권력을 놓고 싸우다가 죽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나는 네가 오래 전부터 정권을 노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너를 섬길 수 있지만 너는 나를 섬길 수 없다. 네가 군주가 되고 나는 평범한 삶을 살겠다."

이렇게 권좌에 오른 제의공은 군주 노릇을 4년도 못하고 비명횡사합니다. 그의 옹졸한 심성이 자초한 일이었죠. 군주에 오르기 전에 그는 병촉이라는 사람의 부친과 친하게 지냅니다. 하지만 사냥 시합에서 패한 뒤부터 앙심을 품습니다. 권력을 차지하고 그는 병촉 아버지의 발을 끊고 병촉을 자신을 보필하는 종으로 삼았습니다. 참혹한 짓을 저지른 것이죠. 이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신하인 염직의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용직도 자기 옆에 두고 부렸습니다. 결국 이것이 화근이 됐습니다. 제의공은 두 사람을 대동하고 '신지'라는 연못에 놀러 갔다가 처참하게 살해됩니다. 염직과 병촉은 원수인 제의공을 죽이고 시체를 숲에 버립니다.

포퓰리스트는 한 때 성공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영원히 존경받을 수 없습니다. 히틀러나 제의공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는 포퓰리스트도 많습니다. 포퓰리스트는 사람들에게 달콤한 약속을 하지만 결국 쓴 현실로 청구서를 내밉니다. 반면 위대한 지도자는 먼저 고통 분담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달콤한 현실로 꽃을 피웁니다.

[장박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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