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사법농단의혹'이 제기됐을 당시 김 대법원장이 내부 문제를 검찰 수사로 넘겨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데,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 사표수리에 대해서도 또다시 정치권을 끌어들여 사법부의 정치적 독립성을 스스로 흔들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4일 임성근 부장판사가 공개한 음성녹음파일에 따르면 김 대법원장은 지난해 5월 임 부장판사가 면담도중 사의를 표명하자 "나로선 정치적 상황도 살펴야 한다. 툭 까놓고 얘기하면 탄핵하자고 저렇게 설치고 있는데 내가 사표를 수리하면 국회에서 무슨 얘기를 듣겠느냐"며 거부했다.
더불어민주당이 작년 4월 총선에서 압승한 직후 판사탄핵 논의를 구체화하자 이를 의식해 사표 수리를 못한다고 버틴 것이다.
하루 전인 3일 "탄핵문제로 사표를 수리할 수 없다는 취지로 말한 사실이 없다"는 김 대법원장의 주장이 거짓말이었던 셈이다.
법치의 보루인 사법부의 수장이 언젠가 들통나게 될 거짓말로 사실을 호도한 것은 정말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게다가 권력 눈치를 보면서 판사탄핵에 간여한 것은 사법부 수장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정치적 중립의무마저 헌신짝처럼 저버린 행동으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임 부장판사가 김 대법원장과의 대화를 몰래 녹음하고 공개한 것을 정당한 행동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만약 녹음파일이 공개되지 않았으면 김 대법원장의 거짓말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고, 여권은 오히려 임 부장판사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였을 것이 뻔하다.
일선 판사들은 김 대법원장의 부적절한 언행에 대해 "정치권 눈치를 보면서 판사 사표 수리를 거부한 사실에 참담함을 느낀다" "법원 구성원으로서 자긍심이 짓밟힌 기분이다" 등 분노와 배신감을 토로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김 대법원장은 진보성향 법관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의 초대 회장 출신이다.
그는 취임 후 "사법부 독립에 온몸을 던지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현 정권이 밀어붙인 '사법농단의혹'수사에 적극 협조하는 등 정권과의 코드 맞추기로 논란을 불렀다.
실제로 사법농단의혹에 연루돼 100명 넘는 판사들이 검찰 조사를 받았고 이중 80여명이 법복을 벗었다. 수십명은 직권남용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하지만 아직까지 유죄를 받은 경우는 없다.
4일 국회에서 헌정사상 최초로 탄핵안이 통과된 임 부장판사도 이중 한명이다.
김 대법원장은 자신의 임명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한 2017년9월 법원행정처 판사 저녁모임에선 "제가 대법원장이 되더라도 피의 숙청이나 인사태풍은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이후 사법농단연루의혹을 이유로 법원장 발령이 점쳐지던 이민걸 전 기조실장 등을 좌천시켰다.
2018년초 사법연수원에서 열린 고등법원 부장판사 교육에선 "나와 생각이 다르면 법원을 나가라"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맞지 않으면 하루빨리 법복을 벗으라고 공개적으로 압박한 것이나 다름없다.
대법원장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정치 외풍과 여론의 압력으로부터 법관의 독립과 신분을 끝까지 보호하는 것이다.
그래야 일선 판사들이 법과 양심에 따라 정의와 법치를 위한 판결을 내릴 수가 있다.
그런데도 김 대법원장이 정권 지시에 따른 검찰의 부당한 사법농단의혹수사를 묵인하고, 판사 탄핵까지 동조한 것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한 사실상 '권언유착'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이런 대법원장이 자리에 있는 한,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과 재판의 공정성은 유지될 수 없다.
지금 사법부에 필요한 존재는 미국의 존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처럼 극심한 정쟁에 휘둘리지 않고 우람한 고목처럼 정치적 중립을 확고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민정책 반대 판결을 내린 순회법원 판사를 비난하면서 자신을 겨냥해 "당신은 오바마 판사들을 두고 있다"고 공격하자 "미국에는 '오바마판사'나 '클린턴판사'는 없다. 오직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헌신적 판사들만 있을 뿐이다"고 맞섰다.
판사들이 특정 정당을 위한 부속품이 아니라는 점을 못박은 것이다.
그 정도 담대한 배짱과 용기를 가져야 사법부 수장으로서 자격이 있고 사법부 독립도 지킬 수 있다.
김 대법원장에게 그런 의지도 능력도 없다면 지금이라도 물러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법원장 스스로 사법부 독립을 포기하는데, 그 누가 사법부 권위와 독립을 인정해주겠는가.
[박정철 논설위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