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근현대미술 거장 작품 등
1만2천여점 감정 내달 마무리
“국외유출 막아 국민 공유 유산화”
“컬렉션 미술관 건립” 의견 나와
로댕의 대표작 <지옥의 문> 위쪽에 붙어 있는 또 하나의 걸작 ‘생각하는 사람’. 이건희 전 회장은 1984년 로댕의 <지옥의 문> 에디션 작품을 국내에 처음 사들여 반입하면서 서구 미술 컬렉터로서의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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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초부터 세계 미술시장 큰손과 딜러들은 한국 재벌 삼성가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삼성이 지난해 10월 별세한 이건희(1942~2020) 전 회장의 상속 재산인 미술품 컬렉션의 감정평가와 가격산정 작업을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서양 근현대미술품과 국내 고미술품 실사를 12월~1월 진행했고 평가액 산정 작업이 이어지는 중이다. 이달 들어선 이중섭·박수근 등 한국 근대미술 수집품 실사도 시작했다. 김앤장 법률사무소 총괄 아래 한국화랑협회 등 3개 민간 미술품 평가 기관이 기밀유지 각서를 쓰고 참여한 작업은 다음달께 마무리될 전망이다. 4월엔 상속세와 관련해 컬렉션을 기증·유지·매각 중 어떤 방향으로 처리할지에 대한 방침을 세무당국에 고지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서울 태평로 전 삼성생명 건물 1층에 1999년 개관했다가 2016년 문을 닫은 로댕갤러리의 내부 모습. 1984년 이건희 회장이 공들여 수집했던 로댕의 걸작 <지옥의 문>이 보인다. |
삼성가의 미술품 컬렉션 규모는 한국 고미술과 근현대미술품, 서양 근현대미술품을 망라해 1만2천점이 넘는 것으로 전해진다. 핵심인 서구 근현대미술 거장 작품은 900여점 정도로 추산한다. 현 시세로 100억~300억원대의 작품이 수십점, 500억~1000억원대 초고가 작품도 상당수다. 이 부문 작품 총액만 2조~3조원에 이를 것이란 추정이 나온다. 미술인들의 전언을 종합하면 경기도 용인 창고, 리움 수장고·전시장, 서울 한남동 자택의 거실 등에 소장 중인 작품은 서양의 근현대미술사를 두루 아우른다. 추상표현주의 거장 마크 로스코의 작품 중 최고로 꼽히는 1950~60년대 작품이 수십점, 시장가 1천억원 이상이라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대표작을 비롯해 고갱·모네·마네 등 인상파 화가의 작품, 국립현대미술관에도 없는 피카소 회화와 판화, 샤갈의 명작 수십점 등이 있다고 알려진다. 앤디 워홀의 인물 초상 시리즈, 재스퍼 존스, 루이즈 부르주아, 칼 앤드리, 사이 트웜블리, 도널드 저드 등 미니멀·팝아트 작가의 대표작도 빠지지 않는다. 이 전 회장 컬렉션을 잘 아는 한 문화계 인사는 “2018년 세기의 경매로 불리며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조원에 육박하는 금액으로 팔린 록펠러 3세의 컬렉션을 능가하는 수준이라 보면 된다”고 전했다.
2004년 10월13일 삼성미술관 리움 개관식. 당시 이건희 회장과 홍라희 관장이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렘 콜하스 등 미술관을 설계한 서구 건축 거장들과 함께 점등 버튼을 누르는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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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술계에선 “세계적 주목도를 지닌 이건희 서양미술 컬렉션을 상속세 때문에 국외 매각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30여년간 국내로 들여온 수많은 명작을 고인의 유지에 따라 잘 보존하고 나아가 국가 미술관에 기증해 국민과 공유하는 세계적 예술자산으로 만들자는 주장이다. 2008년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비자금과 얽힌 컬렉션의 실체가 음습하게 드러났지만, 이 전 회장이 컬렉터로서 기울인 열정과 의지를 폄훼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다. 국가 공공유산화를 꾀한다면 정부 차원의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일본에는 국가미술관으로 전환한 옛 마쓰카타 재벌의 근대 유럽 회화 컬렉션이 있다. 20세기 초 기업가 마쓰카타 고지로가 유럽에서 모은 인상파 화가 컬렉션이 2차대전 중 적국 재산으로 프랑스에 압수되자, 일본 정부는 이를 되찾기 위해 프랑스와 협상했다. 건축 거장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전시관을 짓는다는 프랑스 정부 요구대로 국립서양미술관을 도쿄 우에노공원에 1950년대 말 완공했고, 이 건물은 201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수조원대라는 이건희 컬렉션을 국외 큰손에게 매각하면 다시는 국내로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고인의 생전 뜻대로 한국에서 가치를 빛내는 유산으로 남을 수는 없을까. 정부와 삼성가가 머리를 맞대면 타협할 해법이 있을 터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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