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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0 (목)

‘성전환 군인’ 사망에 애도한 국회, 차별금지법은 토론도 뒷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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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성전환 수술을 한 뒤 강제 전역한 변희수 전 하사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의당 대표실 앞에 변 전 하사의 추모공간이 마련돼 있다. 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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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복무 중 성전환 수술을 받고 강제 전역당한 변희수(23) 전 하사가 숨진 채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정치권에선 4일 애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SNS에 “정치인이자 어른으로서 미안하다”고 적었고, 원희룡 제주지사는 “그의 좌절감이 얼마나 컸을지, 자신에게 쏟아지는 혐오와 비난에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을지 우리는 짐작조차 어렵다”는 말을 남겼다.

국회의 각성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권인숙 민주당 의원은 “지지부진한 평등법, 차별금지법도 죄스럽다”며 “정말 국회는 부끄러워 해야 한다”고 했다. 이소영 민주당 의원은 “당신이 당한 일이 부조리하고 부당하다고 생각해왔으면서도, 정작 정치인이 되어서는 그 일을 바로잡는 일에 동참하지 않고 잊고 지냈다”며 “늦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겠다”라고 적었다.

정치권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 것은 변 전 하사를 보호할 수 있는 규정이 담긴 차별금지법 심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어서다. 국회에 계류 중인 차별금지법 제정안엔 “합리적 이유 없이 성별 등을 이유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분리·구별·제한·배제·거부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돼 있다. 이날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이 추모 성명에서 “국회에 평등법(차별금지법) 제정 논의가 조속히 착수되기를 재차 촉구한다”고 밝힌 이유다.

차별금지법은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지난해 6월 대표 발의해 3개월 뒤 가까스로 국회 법사위에 상정됐다. 하지만 법사위 법안소위에선 아직 단 한 차례 심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함께 회부된 여성가족위원회 등 11개 관련 상임위원회에서도 관련 논의는 없었다. 장 의원은 이날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발의 이후에도 법사위원들이나 여당 지도부에게 법안 심사를 요청했지만 묵묵부답”이라고 말했다.



법안 상정 당일도 찬반 토론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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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지난해 9월 차별금지법이 상정되자 "차별금지법은 있어야 하는 법안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가, 이후 "취지에 공감하지만, 어떤 구체적 내용 중에는 의견 수렴이 필요한 부분도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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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안 상정일인 지난해 9월 21일 회의 때도 마찬가지였다. 찬반 토론은 없었고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의 입장만 논란이 됐다. 추 전 장관은 처음엔 “차별금지법은 추세적으로 있을 수 있는, 또 있어야 하는 법안이 아닌가”라고 밝혔으나, 야당 의원들이 “찬성한다는 거냐”고 재차 묻자 “찬성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다“며 물러섰다. 다만 “긍정적으로 보시는 것은 맞냐”는 질문엔 “예”라고 짧게 답했다.

그러자 소병철 민주당 의원이 나서 “장관이 찬성한다는 취지가 아니다”라며 “예민한 조항에 대해서는 국민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거기에 따라 법무부 입장을 정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추 전 장관은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취지에 공감하지만, 어떤 구체적 내용 중에는 의견 수렴이 필요한 부분도 있을 것이고 그것은 국회에서 결정할 사안”이라며 책임을 국회로 넘겼다.

민주당에선 이상민 의원이 평등 및 차별금지법(평등법) 제정안을 준비 중이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마무리하겠다고 했지만, 종교계의 잇따른 반발에 부딪히며 3개월 넘게 법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의 한 보좌관은 “차별금지법에 관심만 보여도 교회에서 득달같이 전화가 걸려온다”며 “표에 마이너스가 되니 다들 주저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정의당에선 이날 “가덕도 신공항은 절차를 죄다 무시하고 밀어붙이는 민주당이 차별금지법은 남의 집 불구경하듯 한다”(정호진 수석대변인)는 비판도 나왔다.



성 소수자 이슈는 선거 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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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서울광장에서 성(性) 소수자 축제인 서울퀴어문화축제(아래)와 퀴어축제 반대 집회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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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계가 차별금지법을 강하게 반대하는 건 차별금지법 보호 대상에 성 소수자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법안 발의 직후, 한국교회총연합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동성애 보호법이요, 동성애 반대자 처벌법이므로 그 시도를 중단해야 한다”는 반대 입장을 내놓았다.

반발이 크다 보니 ‘진보’를 표방하는 민주당도 선거가 다가올수록 거리 두기에 신경을 쓴다. 윤호중 국회 법사위원장은 지난해 3월 “저희는 이념 문제라든가 성 소수자 문제라든가 불필요한 소모적 논쟁을 일으킬 수 있는 정당과의 연합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밝혀 ‘혐오 발언’이란 비판을 받았다. 4·15 총선용 비례위성정당을 추진하면서 성 소수자 인권 보호를 내세우는 녹색당을 연합대상에서 배제하면서 한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후보 시절인 2017년 4월 TV토론에서 “성적지향 때문에 차별해서는 안 된다”면서도 “(동성애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당시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의 거듭되는 질문에 문 대통령은 “(동성애를) 좋아하지 않는다. 합법화는 찬성하지 않는다”라고도 했다.

최근 서울시장 선거 국면에서 성 소수자의 인권이 야권의 뜨거운 감자가 됐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금태섭 전 의원의 지난달 18일 TV토론에서 ‘퀴어 퍼레이드’가 거론되면서다. 안 대표는 “개인들의 인권은 존중돼야 마땅하다. 그런데 또 자기의 인권뿐 아니라 타인의 인권도 굉장히 소중한 것”이라며 퀴어 축제를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서 여는 게 좋겠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후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 측도 “동성애자에 대한 반인권적인 대우나 차별은 없어야 하지만, 다양한 남녀노소가 모이는 시청 광장에서 축제를 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오 전 시장의 입장”이라고 밝혔다.

정치 컨설턴트인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조금씩 논의 지점이 바뀌고 있다. 보수 진영의 오세훈·나경원 예비후보도 이번엔 ‘성 소수자의 인권’을 강조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느냐”며 “여야가 부담을 나눠진다는 정치력을 발휘하면 차별금지법에 대한 합의가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오현석 기자 oh.hyunseok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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