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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애 작업복을 사 오래... 짠해 죽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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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최은경] 언니가 왔다. 청주에서. 지난겨울 집 근처 수리산 산책길이 좋았는지, 나와 걷는 게 좋았는지 모르겠지만 계절마다 올 거라고 농담처럼 말하던 언니가 진짜로 왔다. 봄이 되자마자 기다렸단 듯이. 언니와 함께 수리산 길을 다시 걸으며 두런두런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러다 언니가 말했다.

"야, 몰랐는데... 학교에서 작업복을 사 오라고 하더라고."

"응? 벌써? 작업복은 실습 같은 거 할 때 입는 거 아닌가? 아직 1학년인데 사 오래?"

언니의 하나뿐인 아들아이는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기계공고’에.

"그러게 말이야. 나도 몰랐잖아. 생각해보니 내 주변에 인문계 아닌 학교에 진학한 애들이 없더라고. 나도 인문계를 당연하게 갔고, 내 친구들도 다. 우리 애가 고등학교에서 기술을 배울지 몰랐지. 근데 말이야. 왜 그렇게 짠하니. 덩치는 산만해도 내 눈엔 아직도 아기 같은데... 작업복을 입는다잖아."

"아이고 못 말려. 이 엄마 아들에게 씌인 콩깍지가 아직도 그대로네... 근데 언니 기술 공부하는 애들만 짠한 건 아닌 것 같아. 인문계 다니는 애들도 엄마들이 보면 다 짠해. 학교 갔다, 도서관 갔다, 다시 책상에 앉아 하루 종일 공부하는 애들 좀 봐. 그게 얼마나 짠해. 그 나이 또래 애들이 다 짠해. 그러니 너무 안쓰러워하지 마."

"그래,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 난 우리 애한테 많은 거 안 바란다. 제발 안 다치고 무사히 졸업했으면 좋겠어."

언니에게 이 말을 하고 보니,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정말 짠하게 느껴졌다. 특성화고든, 인문계든, 특목고든, 예술고든 학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 공부 때문에 그걸 못하는 아이도, 뭘 하면 좋을지 목표가 없는 아이도, 목표는 뚜렷한데 그걸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 아이도, 뭘 하든 공부를 강요받는 아이들 모두가 다 짠했다. 학교 밖이 이렇게나 찬란한데... 이렇게 봄이 오고 있는데... 계절의 변화를 느낄 여유도 없는 아이들이 안쓰러웠다.

베이비뉴스

아이들이 정말 짠하게 느껴질 때, 여러분은 언제인가요? ⓒ베이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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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산행을 마친 언니와 나는 서울 우림시장에 있는 순댓국집으로 향했다. 30년 동안 만화를 그렸던 선배가 어머니가 하던 식당 일을 이어받아 장사를 하고 있다며 놀러 오라고 해서다. 선배가 직접 만든 순댓국과 찐만두, 비빔국수를 "맛있다"를 연발하며 먹었다. "이걸 진짜 선배가 직접 했느냐"면서, 정말 맛있게 그릇들을 비워냈다.

선배는 앉지도 않고 우리 테이블 옆에 서서 팔을 폈다 접었다,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는 일이 고되다는 걸. 나는 선배의 시선을 피해 주위를 둘러봤다. 선배 어머니는 한편에서 만두를 빚고, 선배의 아내는 가게 앞에서 음식 주문을 받았다. 선배의 아이는 핸드폰 삼매경에 빠져 있고.

7평 남짓한 가게는 온 식구들의 일터였고, 만화를 그리던 형의 손은 하루 종일 물이 마를 틈이 없어 보였다. 오전 8시에 나와 재료 준비를 하고, 오후 10시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간다는 선배. 그렇게 오래 일하면 몸이 상하지 않느냐고 걱정과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물었다.

"메뉴가 좀 많아서 그런 것 같아. 그래도... 그동안 내가 하고 싶은 것 실컷 했으니까 이제 가족들도 좀 돌보고 해야지. 몸은 힘들어도 그래도 마음은 이게 훨씬 편해. 경제적으로도 더 낫고."

수리산에서 언니가 "우리 아들 짠하다"는 말이 여기서도 맴돌았다. 선배의 어머니도 그리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아서. "쟤가 30년 동안 만화를 그리던 놈인데... 시장에 나와 음식을 만들어. 짠해 죽겠어" 하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아이든 어른이든 모든 삶은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짠하다. 열일곱 살 아이의 작업복을 사러 가는 엄마 마음도, 아이가 유치원에 가기 시작하면서 육아와 일을 고민하는 엄마 마음도, 업무 중에는 남의 글을 고치고, 퇴근 후에는 내 글을 쓰겠다고 아픈 손가락을 놀려대는 나도 짠한 건 마찬가지. 아니, 오히려 안 그런 사람 찾기가 힘들지도 모르겠다. 겉으로만 봐서는 절대 모르는, 자세히 봐야 겨우 보이는 짠내나는 구석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눈물이 짠가 보다. 삶이 짜서.

다행이라면 삶이 짜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거다. 수리산을 나오기 직전 이제 막 깨어난 봄의 흔적을 여기저기에서 발견하고 탄성을 지르던 언니가 말했다.

"산은 이래서 참 좋아. 바다는 좋은 기분이 '와' 하는 소리와 함께 3초 만에 끝나는데 산은 참 다채롭잖아. 이것 좀 봐."

'산이 다채롭다'는 언니의 그 말이 나는 "삶은 참 다채롭잖아"라고 들렸다. 왼쪽에서 보는 삶, 오른쪽에서 보는 삶, 위에서 보는 삶, 아래에서 보는 삶이 모두 다르다. 그렇게 삶도 다채롭다. 이렇게 생각하니 아이를 키우는 일도 그래 보렸다. 아이를 키우는 일도 다채롭다. 쓰고 보니 진정 그렇다.

짠한 삶도 있지만 짠함만 있는 건 아닌 것처럼, 아이를 키우는 일도 짠함만 있지 않다. 겨우내 참고 꽃을, 잎을 틔운 식물처럼 우리 아이도 반드시 피어날 거다. 아이는 부모가 믿는 만큼 자란다고 했으니, 믿는 대로 틀림없이 잘 자랄 거다. 그러니 한숨일랑 거두고 핏 좋은 작업복부터 골라볼 일이다.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성에 대해 아는 것부터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서 성교육 전문가에게 질문한 성교육 책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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