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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이슈 미술의 세계

바늘과 보따리로 그려낸 페미니즘 미술[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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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이번 ‘환상의 복식조’에 김수자(64)와 함경아(55)를 초대한다. 이들은 작가적 성향, 작품 경향에서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지만 페미니즘 발언이나 여성성 화두를 명시하지 않으면서도 페미니즘으로 독해될 수 있는 중대한 두 요소를 공유, 한 팀의 복식조로서 효력을 갖는다. 하나는 천·바느질·자수 같은 젠더특정적 매체의 기용이다. 천이나 수예 작업은 페미니즘과 무관한 다수의 남녀 예술가들이 조형언어로 폭넓게 활용하고 있지만, 김수자의 보따리나 함경아의 북한 자수를 여성의식이나 젠더적 특성과 분리시켜 생각하기 어렵다. 김수자의 천·바느질 작업이 여성의 일상적 가사행위와 한국의 전통적 여성 역할에 대한 통찰에서 출발했다면, 함경아의 ‘자수 프로젝트’는 북한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해 고안된 여성적 접근의 협업적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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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자의 ‘바늘 여인’(2005, 퍼포먼스 비디오, 비디오스틸, 파탄, 네팔). 김수자 스튜디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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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노마디즘 화두다. 필자는 노마디즘을 해방적 삶을 찾아 타지를 여행하거나 정신적 방랑을 꿈꾸는 고전적 의미보다는, 서구중심적 글로벌리즘에 도전하는 비판적·대안적 개념으로 사용한다. 서구 기준으로 저개발국가를 변화시키는 글로벌리즘이 비서구가 서구사회에 비판적으로 개입, 지역의 문화적 맥락을 지적·윤리적으로 확장시키는 ‘글로컬리즘’으로 재편돼야 한다는 탈중심 명제는 현대판 노마디즘으로 풀이될 수 있는 개연성에 근거한다. 현대판 노마디즘은 장소를 이동함으로써 규범적 현실을 벗어나 새로운 삶의 가치를 회복하고자 한다. 인류학적 관심으로 유목민적 여행을 수행하는 김수자, 여행을 통해 예술적 발상을 촉발·숙성시키는 함경아. 두 작가에게 노마디즘은 세계와 지역, 중심과 주변을 결합시키고 여성적 화자를 가시화시키는 예술적 동력이자 의식적 기재이다.

김수자의 보따리 작업은 바느질과 같은 여성의 가사행위가 예술적으로, 동시에 세계 무대의 맥락 속에서 어떻게 의미화되는지 흥미로운 지점을 보여준다. 어머니와 함께하던 바느질 기억으로부터 천을 이어 붙이는 회화적 천 작업과 조각적 보따리 작업이 탄생했다. 그 보따리는 30년 창작활동과 국내외 전시를 거치면서 양식적·매체적으로 다변화되고 미학적·정치적으로 심화, 확장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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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김수자의 ‘바늘 여인’(2005, 퍼포먼스 비디오, 비디오스틸, 파탄, 네팔). 아래는 ‘떠도는 도시들: 보따리 트럭 2727킬로미터’(1997, 싱글채널 퍼포먼스 비디오, 비디오스틸). 김수자 스튜디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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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전설이 된 역사적 전시회 ‘떠도는 도시들(Cities on the Move)’(1997~1999)은 신자유주의와 글로벌리즘 영향하에 아시아가 지리정치학적 요지로 부상하면서 신도시 건설붐과 새 도시문화가 부흥되던 1990년대를 배경으로 기획된 시의적인 전시회였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서 이정표가 된 ‘떠도는 도시들: 보따리 트럭 2727킬로미터’를 발표했다. 보따리를 가득 실은 트럭을 타고 장장 2727㎞를 달린 방랑의 여정을 기록한 이 비디오에서 작가는 스쳐가는 한국 풍경을 뒤로하며 보따리 위에 걸터앉은 채 고정된 프레임 속에서 내내 뒷모습만 보인다. 현대적 도시현상과 진보개념을 역행하듯 보따리와 쓸쓸한 여인의 뒷모습이 유랑민의 소외와 향수를 환기시킨다.



찌르고 봉합하는 바늘이 되어
지구와 인류의 불행을 지우는 치유자



김수자는 1999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문화적 망명자”를 자처한 그는 이방인의 삶을 영위하는 “한계 상황” 속에서 ‘바늘 여인’과 같은 퍼포먼스 비디오를 탄생시킨다. 첫번째 ‘바늘 여인’(1999~2001)은 도쿄·상하이·런던·뉴욕 등 인구가 밀집한 8개 대도시에서 촬영한 다채널 비디오다. 작가는 여기서도 관객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대도시 군중 물결 한가운데 부동의 자세로 서 있다. 내적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부동의 뒷모습, 그 특유의 이러한 미장센은 도쿄 시부야 번화가에서 느꼈던 실존적 경험에 근간한다. 행인 인파로 자신이 “지워지는” 느낌을 받는 순간, 그들과 하나 되는 일체감으로 “안도와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고 그는 회고한다. 이것이 무명의 군중을 보자기로 감싸는 연민·포용·환대의 감흥이 아니었을까?

두번째 ‘바늘 여인’(2005~2009)에서 작가는 정치적·종교적 분쟁, 내전·폭력과 빈곤으로 피폐해진 6개 도시인 파탄·예루살렘·사나·하바나·리우데자네이루·은자메나를 탐방했다. 착취되고 거세된 현장, 유토피아·디스토피아가 엇갈리는 혼란을 대면하면서 작가는 자신이 찌르고 봉합하는 바늘이 돼 지구와 인류의 불행을 지우는 치유자가 되기를 염원했다.

우리를 각성시키는 바늘 여인의 메시지는 ‘실의 궤적’(2010~2019) 연작에서 다른 모습으로 계승된다. 인류학적·고고학적·문명사적 다큐멘터리이자, 유럽과 남·동아시아, 북·남미, 아프리카 등 다른 문화권을 이동하며 직물의 경로를 추적한 이 대하 서사시에서 작가의 모습은 사라지고 카메라 뒤에서 응시하는 눈이 직조문화의 원형적 장면과 어휘를 포착하며 다양한 직조문화에 내재한 인간 존재의 원형, 원초적 생명원리를 발견하게 한다.

김수자는 한편으로 자신의 몸을 매체화하는 숨소리 사운드 퍼포먼스를 수행해왔다. ‘직조공장’(2004)은 폴란드 우치의 공장 빈 건물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숨소리와 허밍 사운드로 공장을 재가동시킨다는 개념으로 발상됐다. 들숨·날숨의 반복되는 호흡을 씨줄·날줄로 교차되는 직물에 유비시키는 호흡 퍼포먼스는 2006년 베니스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발표한 ‘호흡: 보이지 않는 거울, 보이지 않는 바늘’로 본격화됐고, 같은 해 마드리드 크리스탈 팰리스 개인전 ‘호흡: 거울여인’에서는 건축물에 부착된 특수필름과 바닥에 설치된 거울을 통해 반사되는 빛이 호흡 퍼포먼스와 어우러지는, 빛과 호흡이 공명하는 공감각적 보따리를 창출했다.

숨소리와 빛으로 공간을 감싸는, 탈물질화된 보따리를 ‘후기 보따리’로 명명한다면,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가 이를 명문화한다. 작가는 한국관의 유리 전면을 특수필름으로 덮어 무한대로 굴절되는 무지갯빛으로 공간을 가득 채우고, 바닥에 거울을 부착해 반사된 빛을 재투영시키는 만화경 같은 미러링 효과를 연출했다.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시리즈 개인전 ‘마음의 기하학’에서도 관객이 점토를 구형으로 빚게 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후기 보따리’를 예증했다. 특수필름을 사용하는 빛 작업과 함께 ‘구의 궤적’이란 새로운 소리 작업으로 관객을 공명시켰다. 커다란 타원형 탁자 위를 굴러가는 찰흙 공의 마찰 소리와 작가의 가글링 소리가 뒤섞인, 어떤 언술보다 강력한 주술적 초성의 마력이 관객과의 일체감을 조성했다. 이로써 주객체를 연결하는 ‘마음의 기하학’이 완결됐다.



지성적 사유와
독창적 상상력을 동반하는
탐구여행



함경아의 노마디즘은 자신과 연결된 확장된 세계로의 관심과 문명비판적 의식에서 비롯된 실천적 방법론으로 이해된다. 초기작 ‘노란색을 쫓아서’(2000~2001)는 미술의 조형적 요소인 (노란)색을 매개로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마주친 임의의 사람들과 관계맺기를 시도한 비디오 작품이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작가 스스로 카메라 렌즈가 돼, 또는 프랑스 파리가 아니라 아시아 대도시를 배회하는 21세기 여성 ‘플라뇌르’가 돼 우연히 맞닥뜨리는 신비스러운 만남을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보는 남성과 보이는 여성’이라는 주객체 시각의 법칙을 전복하고 여성주체로서 응시·추적의 행위자가 됐다. 이렇게 여성적·비서구적 시각으로 비선형적·탈권위적 소서사를 피력한 점에서 함경아 추적 이야기에 내재된 정치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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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함경아의 ‘뮤지엄 디스플레이’(2000~2010, 4.5×4.5×2m, 비엔나 루드빅미술관 설치 전경, 미술관 찻잔 등 오브제, 플렉시글라스, 형광등, 거울, 나무). 아래는 함경아의 ‘불편한 속삭임, 자수 나라/나가사키, 히로시마 버섯구름’(2010~2011, 320×164㎝, 북한 손자수, 면 위에 비단실, 중간자, 밀수, 검열, 압수, 뇌물, 긴장감, 근심, 이데올로기, 나무 프레임).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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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2010년 장기 프로젝트로 진행된 ‘뮤지엄 디스플레이’에서 작가는 뮤지엄 카페·숍에서 “훔친” 물건들을 뮤지엄 전시 형식 그대로 진열해 놓는다. 세계 문화강국의 뮤지엄들이 제국주의 시대 약소국으로부터 강탈한 문화유산을 자랑스러운 소장품으로 버젓이 진열하고 있는 뮤지엄 관행을 패러디한 것이다. 작가는 역사적으로 묵인돼온 약탈행위를 모방하기 위해 물건을 훔쳤고, 비싼 문화재들의 소유권과 사용권이 이전된 상황을 모방하기 위해 훔친 물건들을 다른 나라·장소의 물건들과 바꾸어 놓았다. 약탈된 문화재가 다시 방탄유리 안에서 전시되는 모순된 상황을 모방해 뮤지엄 디스플레이로 진열했다. 이 작품의 진의는 문화 강대국의 만행과 뮤지엄 문화에 대한 비판과 응징에 있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쓴 작가의 방대한 장물 컬렉션이 수년간 발품을 팔며 전 세계를 누빈 여행 아닌 여행의 필연적 결과물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2006년 광주비엔날레 출품작 ‘허니 바나나’는 과거 이국적 고급 과일이었던 바나나에 얽힌 유년 시절의 기억을 추적하며 제주도·필리핀·독일·동유럽 등에서 마주한 다층적 상황·이야기를 보여주는 영상과 설치 작업이다. 바나나의 생산, 수확, 유통 과정 등에 드러나는 비윤리적·반환경적 현장을 목격하며 작가는 신자유주의와 글로벌 경제체제의 암울한 이면인 다국적 기업의 횡포와 자본주의의 역기능을 통감했다.

자신의 창작활동을 “도서실과 실험실”에 비견시키듯, 그는 지성적 사유와 독창적 상상력을 동반하는 탐구여행을 통해 인식의 스펙트럼을 확장시킨다. 2000년대 후반부터 진행한 ‘자수 프로젝트’는 특유의 “여행의 정치학”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가장 위험하고도 창의적인 여행이다. 집 앞에서 우연히 발견한 북한의 선전용 ‘삐라’를 보고 북쪽 사람들과의 소통·협업을 꿈꾸며 시작하게 된 이 추상적 여행은 적대관계에 놓인 남북한을 자수로 연결하는 화합의 실크로드이자, 초이념적·초체제적 오디세이로 각인된다. 폐쇄된 사회 속 북한 사람들에게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에서 작가는 인터넷에서 수집한 뉴스·보도사진을 밑그림으로 재제작한 원본을 그곳의 수공예가들에게 보낸다. 그들은 원본대로 한뜸 한뜸 수놓은 자수작품으로 바꾸어 다시 작가에게 전달한다. 이 프로젝트는 창의적이면서도 여성의 속삭임과 같은 은밀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디지털 원본이 노동집약적 아날로그 손자수로 전환돼 돌아온다는 용의주도한 발상은 중간자, 제3국을 거쳐 제작된 후 검열을 피해 돌아와야 하는 비밀스러운 첩보작전으로 그 실현이 가능하다.

자수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과 인내의 고통이 이 프로젝트에 수반되는 필수 과정이다. 핵폭파 보도사진을 기념비적 크기로 확대한 양면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버섯구름’(2008)으로부터, 한반도 분단과 신탁통치를 밀약한 5개국 제국주의 열강의 힘을 과시하듯 현란한 색채와 남근적 형상으로 거대하게 재현된 ‘5개 도시의 샹들리에’(2014~2019)에 이르기까지, 지난 10년간 운좋게 돌아온 작품들은 서로 보지도·알지도 못하는, 세계사의 희생자인 남북의 두 “유령”, 위탁자인 작가와 피위임자인 자수 장인들의 암묵적 협업이 만든 성공적 결과물이다.

김수자와 함경아의 작품세계를 연결하는 공통의 키워드는 ‘관계맺기’라 말할 수 있다. 김수자의 보따리는 나와 타인, 나와 세계를 일체화시키는 포용의 기재로, 함경아의 자수 프로젝트는 남북 분단을 해소할 수 있는 비언어적 대화로 개념화된다. 이들의 관계맺기는 예술적·윤리적인 탐사여행, 즉 노마디즘으로 추동된다. 자연적 장소를 실천적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장소의 퍼포먼스’에 의해 전 지구적 공생, 타자와의 조응, 동시대 재앙에 대한 연민과 치유, 교차문화적 연합을 위한 윤리적 결단이 촉구되는 것이다.

관계맺기, 공존의 미학을 발현시키는 노마디즘은 자연스레 환대에 결부된다. 환대의 가치는 누구에게나 개방적인 지적 풍요와 해방적인 자유정신에서 찾아지는데, 이것이 예술적으로 실천될 때 놀라운 반전의 효과를 나타낸다. 도덕적 제어나 조건 없는 환대는 자기중심적·지역중심적 문화예술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념·종교·인종·젠더적 폭력에 대항할 유연한 방패가 된다.

치유자·매개자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암시하는 김수자의 포용적 보따리, 분단의 주제에 쌍방형 대화로 접근하는 함경아의 애타적 자수 프로젝트에서 환대의 가치를 발견하며, 이들의 작품을 환대를 통해 지평을 넓히는 확장된 페미니즘 미술로 이해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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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자이자 평론가·큐레이터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과 경기도미술관, 대안공간 쌈지스페이스 관장 등을 거쳐 현재 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이다. 카셀도큐멘타14 감독선정위원·광주비엔날레 총감독·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등을 지냈다. 다수의 페미니즘 미술전과 백남준·미디어아트 전시를 기획했다. 저서로 <여성과 미술> <굿모닝 미스터 백> <큐레이터는 작가를 먹고산다> 등이 있다. 김세중상(저작출판), 석주미술상(평론), 월간미술대상(큐레이터) 등을 수상했다.



김홍희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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