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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4 (화)

D-8 아카데미 시상식...한국은 들뜨고 중국·일본은 썰렁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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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처럼 올해 오스카에서 아시아 감독 주목
영화 '노매드랜드' 클로이 자오 감독...중국 출신
6개 부문 후보 수상 유력...中, 시상식 중계 말라
日, 자국 애니메이션 후보서 탈락해 '멘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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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지난해 2월 9일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로스앤젤레스의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해 '기생충' 출연진과 제작진이 시상대에 올랐다.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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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이후 1년 만에 또다시 전 세계 영화계는 한 아시아계 감독의 영화에 집중하고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중국계 여성감독 클로이 자오(39)다. 그가 제작한 영화 '노매드랜드'는 현재까지 영화 관련 시상식에서 220개 이상의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자오 감독과 그의 작품은 25일(현지시간) 열리는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오스카)에서도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지난해 '기생충'과 같은 행보를 이을지 주목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개봉(15일)을 맞아 자오 감독을 향해 '단일 시즌 최다 수상 감독'이라는 문구로 홍보가 한창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가장 시끌벅적해야 할 중국 본토가 유독 조용하다. 옆 동네 일이긴 하지만 일본도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도대체 그 이유가 뭘까.

정이삭, 윤여정 그리고 클로이 자오...'오스카' 아시아계 영화인 축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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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나리'의 정이삭(왼쪽부터) 감독과 배우 윤여정, 한예리, 스티븐 연. 판씨네마 제공


국내에서는 지난해 이어 '기생충' 열풍을 이어갈 것이라며 재미교포인 정이삭 감독이 만든 영화 '미나리'에 기대를 걸고 있다. 비록 '기생충'처럼 국내 자본으로 만들어진 순수 한국 영화는 아니지만, 한국계 감독과 배우들이 한국어 대사로 만든 영화라는 점에서 팔이 안으로 굽는 법이다.

'미나리'는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있다. 특히 배우 윤여정(74)에 대한 수상 가능성도 높게 점쳐지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 고무된 상황이다.

윤여정은 올 들어 제78회 골든글로브에 이어 제27회 미국 배우조합상(SAG), 제74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BAFTA) 등 '미나리'를 통해 무려 60개 이상의 상을 싹쓸이했다. 한국 배우로는 최초로 상을 휩쓸고 있어서 그야말로 새 역사를 쓰고 있는 중이다.

이로 인해 국내에선 오스카 열기가 상당히 뜨겁다. 지난해 주인공인 봉준호 감독이 시상자로 오스카 무대에 오르기로 돼 있고, 더불어 윤여정도 여우조연상 수상을 위해 무대에 오른다면 그야말로 한국인의 잔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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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매드랜드'의 클로이 자오 감독이 11일 영국 런던 로열 앨버트홀에서 비대면으로 개최된 제74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BAFTA)에서 감독상을 받고 화상으로 소감을 전하고 있다. BAFTA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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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한국뿐인 듯싶다. 중국과 일본에선 오스카 시상식에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인다. 특히 자오 감독은 이번 시상식에서 정이삭 감독보다 더 수상이 유력하지만 중국에선 시큰둥하다.

윤여정이 아시아 배우로서 새 역사를 쓰고 있다면, 자오 감독도 아시아 여성감독으로서 다시 없을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

지난해 제77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 수상으로 전 세계 영화인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자오 감독은 이후 아시아계 여성 감독으로는 최초로 이번 골든글로브에서 감독상과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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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윤여정이 11일 영국 런던 로열 앨버트홀에서 비대면으로 개최된 제74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BAFTA)에서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받고 소감을 밝히고 있다. BAFTA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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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최근 오스카 전초전이라 불리는 제73회 미국 감독조합상(DGA)에선 비백인(유색인종) 여성 최초로 감독상을 수상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오스카에서도 수상한다면 아시아 여성감독으로서 역사를 새로 쓰게 된다.

이번 오스카 시상식은 정이삭 감독과 윤여정, 그리고 자오 감독 등 아시아계 영화인들의 빛나는 역사적 순간이 될 전망이다. 영국 BBC방송은 벌써부터 '2021년 최고의 영화 8편'에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와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를 꼽았다.

BBC는 "'미나리'는 절제하면서도 반짝거리는 자서전 같은 드라마"라고 했고, "'노매드랜드'는 자오 감독과 배우가 너무 능숙하게 사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는데, 이는 훌륭한 업적"이라고 호평했다.

중국 정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생중계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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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주(州)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 앞서 '오스카' 동상이 전시돼 있다.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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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우선 자오 감독이 베이징 출신의 자국 감독이긴 하나 중국의 이미지와 명성을 훼손시켰다는 반감이 작용하고 있는 분위기다.

중국 정부는 지난달 오스카 시상식을 생중계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이 같은 지침은 이번 오스카에서 자오 감독의 영화 '노매드랜드'가 주요 부문 후보에 오르며 수상이 유력한 가운데 내려졌다.

최근 2년 동안 중국에서는 관영 CCTV가 운영하는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 두 곳에서 아카데미 시상식을 생중계했다.

이뿐만 아니다. 중국에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도 '노매드랜드' 금지령이 내려졌다. 지난달부터 이 영화 관련 해시태그(#)가 비활성화되고 있는 것.

중국 내 인기 플랫폼인 웨이보에서는 '노매드랜드'가 들어간 문구를 쓰면 "관련 법률, 규정 및 정책에 따라 페이지를 찾을 수 없다"는 메시지가 표시되고 있다.

불똥이 튄 건 홍콩도 마찬가지다. 홍콩에선 52년 만에 아카데미 시상식이 중계되지 않을 전망이다. 홍콩 최대 방송사인 TVB는 지난달 아카데미 시상식을 중계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TVB는 "단순히 상업적 결정"이라고 언급했지만, 1969년부터 51년 동안 해마다 이 시상식을 중계해 왔던 터라 시청자들에겐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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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매드랜드'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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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TVB를 비롯해 홍콩 내 그 어떤 방송국에서도 이번 시상식을 볼 수 없을 것으로 전해졌다. 홍콩 국가보안법(홍콩보안법) 이후 방송사 등 홍콩 언론들이 중국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2월 진행된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자오 감독이 '노매드랜드'로 감독상, 작품상을 받았을 때만 해도 중국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가 "아시아 여성감독 최초로 골든글로브 감독상을 수상했다"며 중국의 자존심으로 치켜세웠다.

그러나 이후 자오 감독의 8년 전 인터뷰가 발목을 잡았다. 그는 미국 잡지 필름메이커에서 "내가 10대에 고국을 떠나던 시절 중국은 거짓말투성이였다"고 비판한 내용이 전해졌다. 중국에선 자오 감독의 국적 문제와 중국에 대한 과거 발언을 지적하며 SNS를 중심으로 "배신자"라는 낙인찍기가 벌어졌다.

중국에선 다음달 23일 '노매드랜드'를 개봉할 예정이지만 이 역시 확실치 않은 상황이다.

미 매체 노스웨스트 아시안위클리는 "중국의 민족주의 평론가들은 자오 감독이 자신을 '두 얼굴'이라고 부르며, 국영 기업의 전직 최고경영자(CEO)였던 아버지의 부를 바탕으로 나라를 떠났다"면서 "조국을 배신했다고 말하고 있다"고 전했다.

애니메이션 강국 日의 무너진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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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열리는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단편 다큐멘터리상 후보에 오른 '두 낫 스플릿'의 한 장면


중국은 이런 분위기 속에 오스카의 단편 다큐멘터리상 후보에 오른 '두 낫 스플릿'도 눈엣가시다. 이 영화는 2019년 벌어진 홍콩 민주화 시위를 담아내 중국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분석이다.

35분짜리 이 다큐멘터리는 노르웨이 출신 앤더스 해머 감독이 만든 작품이다. 해머 감독은 당시 홍콩에 몇 달 동안 머물며 집회 현장의 살아 숨쉬는 영상을 담아냈다.

그는 오스카 후보에 오른 뒤 "홍콩에서 민주주의가 실종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길 바란다"는 소감을 전했다. 그러자 중국은 발끈했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두 낫 스플릿'은) 예술성이 부족하고 정치적 편견으로 가득한 영화"라며 아카데미상을 정치적 도구로 만들 것이라는 평론가들의 비판을 그대로 보도했다.

일본도 오스카에 냉랭하긴 마찬가지다. 자국이 밀었던 애니메이션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이 오스카의 장편 애니메이션상 후보 지명에서 탈락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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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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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케이신문 등 일본 언론들은 일제히 '귀멸의 칼날'이 오스카 시상식의 장편 애니메이션상 후보에서 제외된 소식을 전하며 크게 아쉬워했다.

일본이 씁쓸한 이유는 '귀멸의 칼날'이 엄청난 히트를 기록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19년 동안 정상을 지킨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기록을 깨고 역대 박스오피스 1위를 갈아치웠고, 지난해 10월 개봉한 후 현재까지 누적 흥행 수입이 400억 엔(약 4,100억 원)에 달하는 등 전 세계 영화 흥행 수익에서도 큰 업적을 달성하고 있다.

이런 기세 속에 자존심이 상할 일도 있다. 오스카 시상식 후보에 오르지 못한 것도 아쉬움이 큰데 장·단편 애니메이션상 후보에 오른 유일한 아시아 작품이 한국 출신 감독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자타공인 세계 애니메이션 강국으로 꼽히는 일본으로선 체면이 구겨질 만하다.

국내에서도 2020년 대한민국콘텐츠대상 애니메이션 부분 장관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는 에릭 오 감독의 '오페라'가 단편 애니메이션상 후보에 올랐다. 우리나라로서는 또 한번의 수상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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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밤쉘'로 분장상을 받은 일본 출신 가즈 히로. 로이터 연합뉴스


앞서 일본은 현재 중국이 자오 감독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을 먼저 경험한 적도 있다. 지난해 오스카 시상식에서 영화 '밤쉘'의 특수 분장을 맡아 분장상을 거머쥔 일본 출신 가즈 히로의 수상 소감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건 미안하지만, 나는 일본을 떠나 미국인이 됐다"며 "일본에선 꿈을 이루기 힘들어서 미국에 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당시 한 일본 언론이 '일본인으로서 경험이 수상에 도움이 되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반면 봉준호 감독은 이들과 다른 행보로 더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는 오스카 시상식에서 "올해가 한국영화 100주년으로 의미있는 수상"이라거나 "한국의 첫 오스카 트로피(각본상 수상)" 등 자국에 의미를 둔 소감으로 차별화했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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