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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6 (목)

국제 표준 몰랐던 대통령이 해운사에 했던 약속 끝내 못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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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국제서 통용 안 되는 해운사 회계기준 개선 지시
난감했던 금융위는 대통령 지시 이행 대신 미봉책으로 대응

2019년 1월 15일 문재인 대통령은 해양수산부와 금융위원회에 해운회사의 부채비율(부채액을 자기자본으로 나눈 것)을 낮출 방안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이날 ‘2019 기업인과의 대화’ 행사에서 우오현 삼라마이다스(SM)그룹 회장의 간곡한 요청을 들었기 때문이다. SM그룹은 대한해운(005880)의 모회사로, 대한해운은 부채비율이 292%(2020년 말 연결 기준)에 달해 현재 SM그룹은 부채비율을 낮추기 위해 유상증자를 추진하고 있다.

당시 우 회장은 문 대통령에게 "해운사들은 선박 한 두척만 사들여도 높은 부채비율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이라며 대책을 요구했다. 해운사는 보통 선박을 살 때 90%가량의 비용을 금융회사에서 빌려온다. 이 빚은 선박 운임으로 장기간 갚는다.

문제는 한 번에 거액의 빚이 생기면서 해운사의 부채비율이 급등한다는 점이다. 금융사는 부채비율이 급등한 해운사에 대해 재무 건전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다시 선박을 사려 대출을 하려고 할 때 대출금리를 크게 올린다. 배를 한 두척만 사도 부채비율이 급등해 재무 건전성이 취약한 회사로 전락하는 것이다.

조선비즈

지난 2019년 1월 15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2019 기업인과의 대화’ 행사를 주재하며 발언하고 있다.



기업인이 이런 어려움을 토로했고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해결법을 알아보라고 지시했지만, 2년이 지나도록 달라진 것은 전혀 없다. 아직도 대한해운처럼 많은 해운사가 높은 부채비율에 시달리고 있다. 이유는 주무 부처인 금융위원회가 소극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2019년 당시 해운사들이 요구했던 방안은 재무제표에 선박을 살 때 빌린 돈(부채)과 새로 자산으로 편입된 선박의 가치를 일부 상계해서 부채로 기입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500억원짜리 벌크선을 450억원의 대출과 50억원의 자기자본으로 샀다면 기존에는 자산(벌크선)을 500억원 그대로 기입하고 부채액도 450억원이 기재된다. 부채비율은 자기자본에 대한 부채액의 비율이기에 900%(450억/50억*100)가 된다. 그런데 500억원짜리 벌크선을 자산 항목에 250억원짜리로 기입하고 이 250억원 만큼을 부채액에서도 차감해 부채 항목에 200억원으로 기입하면 부채비율은 400%(200억/50억*100)로 낮아진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자산으로 편입된 선박 가치의 일정 부분을 줄이고 이 줄인 부분을 부채액에서도 차감해서 재무제표에 기입하면 부채비율도 줄어드는데 이런 요구를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회계처리는 국제회계기준(IFRS)에서 허용하지 않는다. 한 관계자는 "IFRS를 도입한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자산과 부채를 상계해서 과소 계상해 회계처리를 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규칙인데 이를 대통령이 검토해보고 대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것 자체가 말이 안 돼 금융위가 무시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조선비즈

그래픽 = 정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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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지시한 사항에 대해 아무런 해결책을 내놓을 수 없게 되자 다급해진 금융위는 대신 해운사에 다른 혜택을 주는 방안을 마련했다.

IFRS는 2019년부터 해운사가 화주와 선박을 장기간 빌려주는 계약(장기운송계약)을 맺으면 이를 채권(영업 외 수익)으로 회계 처리하도록 했다. 과거에는 장기운송계약을 매출(영업수익)로 회계처리를 했는데 채권으로 처리하면 영업수익이 감소해 회사의 수익성이 악화하는 것처럼 재무제표에 기록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다만 IFRS는 2019년 이전의 장기운송계약에 대해서는 어떻게 회계 처리를 해야 할지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에 금융위는 회계처리 감독지침을 발표해 2019년 이전에 체결된 장기운송계약에 대해서는 계약이 종료될 때까지 종전처럼 매출로 잡아도 된다는 방침을 밝혔다. 장기운송계약이 한번 체결하면 보통 10년 이상 이뤄지는 것을 고려하면 해운사들에 큰 혜택을 제공한 셈이다. 이런 식의 회계처리로 IFRS의 적용을 받는 대한해운 등 8개 해운사가 장기운송계약의 잔여기간까지 최대 6조원의 매출이 늘어날 것으로 해운협회는 추산했다.

대통령은 국제 기준에 전혀 맞지 않는 지시를 했고 지시를 받은 금융위는 어떻게든 해운사들을 달래기 위해 다른 방식의 혜택을 제공하며 미봉책으로 대응한 셈이다. 한 회계전문가는 "금융위는 이런 조치로 대통령의 지시 사항이 해결됐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해운사들이 배를 살 때 부채비율이 급증하는 본질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이 안 된 상태"라고 했다.

정해용 기자(jhy@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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