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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애국빠’들이 몰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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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운동의 발원지 베이징대학 훙러우…
‘샤오펀훙’은 5·4 애국청년들의 ‘희망과 실망의 전환’을 이해할까


한겨레21

베이징대학의 붉은 벽돌 건물 ‘훙러우’. 1919년 5월4일 중국 애국청년들은 이곳에서 출발해 톈안먼 광장으로 향했다. 위키미디아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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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는 방금 전까지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살갑게 저녁을 먹던 중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술잔 대신 고성과 삿대질이 오가더니 급기야 술잔까지 집어던질 기세로 싸웠다. 각기 중국 ‘금융계’와 ‘출판계’를 대표하는 ‘모범 직장인’이라고 소개하며 화기애애하게 반주를 곁들이며 시작된 식사 자리였다. 코로나19가 확산되고 거의 1년6개월 만에 베이징을 벗어나 안후이 지역으로 떠난 도보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우연히 산속 농가 민박집에서 함께 묵은 그들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며 도보여행의 즐거움에 대해 이런저런 한담을 나누던 중, 민박집 공용 식당에 걸린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보았다. 그 사진이 사달을 일으켰다.

1969년 4월1일 베이징에서 열린 제9차 당대회에서 마오쩌둥과 린뱌오가 마지막으로 함께 찍은 빛바랜 사진이었다. 린뱌오는 마오가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은 인물이다. 사진을 보던 두 남자는 ‘아주 귀중한 사진’이라며 술잔을 부딪친 뒤, 화제를 마오와 린뱌오에 얽힌 애증사로 옮겨갔다. 그러다 차츰 대화가 ‘거창하게’ 흘러갔고 급기야 ‘중국 혁명의 마지막 임무인 대만 수복’ 문제로까지 이어졌다. 여기서부터 두 남자의 의견이 갈렸다. 금융계 쪽 남자는 대만을 ‘자유지대’로 남겨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콩과 마카오도 되찾았고 우리나라 국력도 이제는 미국과 맞짱 뜰 정도로 성장했으니, 대만은 ‘민주주의 실험 기지’로 남겨두는 게 좋다. 어떤 정치체제와 통치 형태가 더 도움되는지 봐야 하지 않나?”

이 말을 들은 출판계 남자는 당장 두 눈에 격노의 빛이 보이더니 술을 한잔 거칠게 들이켠 뒤 갑자기 고성을 날렸다. “이 무슨 매국노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대만은 우리가 진즉에 수복했어야 할 ‘우리 영토’다. (나를 한번 힐끔 쳐다본 뒤) 항미원조 전쟁(한국전쟁)만 아니었어도 대만은 벌써 수복했을 텐데. 그런데 뭐, 자유지대? 그러고도 당신이 애국을 말할 자격이 있나? 저 사진을 보고도 뭐 깨닫는 게 없나? 나라를 배신하는 놈들의 최후는 린뱌오 꼴 나는 거다. 어찌나 가짜 애국주의자들이 설치는지….”

금융계 남자도 물러서지 않고 출판계 남자를 공격했다. “누가 애국자인지 아닌지 당신이 뭘 안다고 함부로 판단해! 애국주의 웃기네. 뇌는 없고 머리가 뜨거워지면 광분해서 날뛰는 것들이, 무슨 애국주의….”

일본차와 운전자의 머리를 친 남자 2021년 3월25일, 중국 외교부 대변인 화춘잉이 한 외신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신장웨이우얼족 강제노동에 항의하며 “우리는 신장 면화를 쓰지 않는다”고 선언한 다국적 의류기업 에이치앤엠(H&M)과 나이키 등에 대한 중국인들의 집단 불매운동과 애국주의 소비운동이 거세게 일자, 외교부 정례 브리핑 시간에 한 외신기자가 이와 관련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화춘잉 대변인은 매섭고 단호한 목소리로 이렇게 일갈했다. “중국 누리꾼은 자신들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특히 현재 중국 누리꾼은 국가의 명예와 존엄을 매우 중요시한다. 이는 절대로 민족주의가 아니라 소박한 애국주의다.”

2012년 9월15일, 시안의 번화한 거리에서 한 무리의 ‘반일 시위대’가 “일본을 타도하고 일본 상품을 쓰지 말자!”는 구호를 외치며 애국시위를 벌였다. 당시 일본이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의 국유화를 선언하자, 중국 전역에서 연일 극렬한 반일시위가 일어났고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광풍처럼 퍼져갔다. 그날 21살 미장공 청년 차이양은 버스를 타고 가던 중 시위 행렬에 길이 막히자, 버스에서 내려 시위대에 합류했다. 허난성의 가난한 농민공 출신인 그는, 초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하고 일찌감치 건설현장 등으로 돈벌이에 나섰다. 시안의 대학가 부근에서 자기 또래의 수많은 청년이 애국시위를 하는 모습을 본 차이양은 곧바로 ‘머리가 뜨거워져서’ 거리에서 “타도 일본”을 외치며 절절한 애국심을 분출했다.

그러던 중, 한 중년 남자가 일본 도요타 자동차를 몰고 오는 것을 발견했다. 차이양은 유(U)자형 오토바이 쇠자물쇠를 들어 도요타 자동차를 내려쳤다. 그때 운전자의 아내는 차이양에게 빌듯이 애원했다. “우리도 힘들게 벌어서 산 차다. 제발 부수지 마라. 우리가 일본 자동차를 산 건 잘못했다. 앞으로는 사지 않을 테니, 제발.” 도요타 자동차를 내리치고, 그 운전자의 머리도 함께 내려친 차이양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애국 행위다!”

한겨레21

2012년 8월19일 중국 광둥성 선전의 반일 시위대가 일본제 차량을 뒤집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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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운동의 핵심은 ‘애국주의 정신’일까 1919년 5월4일, 베이징대학 훙러우(红楼·붉은 벽돌 건물)에서 출발한 학생들이 톈안먼(천안문) 광장으로 행진했다. “매국노를 처단하자” “21개조(당시 북양 정부 총통 위안스카이가 일본과 맺은 불평등조약)를 폐기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대적인 ‘애국주의 반제 시위’를 벌였다. 그 유명한 중국 5·4운동의 시작이었다.

당시 베이징대학 제1캠퍼스 격이던 훙러우는 1918년에 지어 중국 애국청년운동과 신문화운동의 요람이 된 곳이다. 초대총장 차이위안페이를 중심으로 ‘민주와 과학’을 기치로 내건 중국 지식인들의 ‘신문화 운동’을 주도했다. 리다자오와 천두슈, 마오쩌둥 등 초기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처가 되기도 했다. 1920년 리다자오는 이곳에서 초기 사회주의자 19명과 함께 마르크스주의연구회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했다. 리다자오를 비롯해 3명으로 구성된 베이징공산당 소조가 탄생한 곳도 베이징대학 훙러우다. 중국 혁명의 근거지이자 20세기 1세대 애국주의 청년들의 탄생지인 셈이다.

5·4운동 때 중국에 머물던 미국 철학자 존 듀이는 “우리는 지금 한 민족과 국가의 탄생을 목격하는 중”이라고 했는데, 베이징대학 훙러우는 바로 그 산파 구실을 했다. 훙러우는 현재 중국 청소년과 학생, 시민들에게 애국주의 교육을 하는 중요한 ‘역사유물’로 지정돼 있다.

2019년 5·4운동 100주년을 맞아 시진핑 주석은 기념사에서 5·4운동의 ‘애국주의 정신’을 거듭 강조했다. “5·4운동은 애국과 진보, 민주, 과학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5·4정신을 배양했고, 그 핵심은 애국주의 정신이다. 손중산(쑨원)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바로 어떻게 애국할 것인가를 아는 것’이다. 모든 중국인에게 애국은 본분이자 직책이고….” 하지만 1919년 훙러우에서 시작된 5·4운동은 사실 당시 중국 청년과 지식인의 ‘희망과 실망의 전환’이 빚은 각성이자 분노의 표출이었다.

5·4운동을 연구한 중국 역사학자 뤄즈톈은 <격변시대의 문화와 정치>라는 책에서 “5·4운동은 당시 중국 사회를 5·4운동 전후 시대로 나누는 분수령이 된 사건이다. 5·4운동이 일어나기 전 각계 중국인은 세계와 중국의 정치사회적 상황에 대해 희망에서 실망으로 급격한 전환이 이뤄지고 있었고, 이는 5·4운동 촉발에 깊은 영향을 줬다”고 분석했다. 그가 말한 ‘희망에서 실망으로 급격한 전환’이란 바로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분위기를 말한다.

승전국 일원이 되어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로 들끓던 때, 중국인은 서구 열강이 약탈한 각종 이권을 되찾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약 6개월 뒤 파리강화회의에서 승전국 열강이 패전국 독일이 가진 중국에 대한 대부분의 이권을 일본에 넘겨주는 것으로 합의하자, 급격한 ‘실망과 절망’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매국노’와 ‘열강 등의 실체’를 각성하기 시작했고, 순진한 희망과 환상을 버리고 베이징대학 훙러우에서 출발해 톈안먼 광장으로 행진했다. 당시 거대한 애국주의 함성이 온 베이징 하늘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고 한다.

2008년 젊은 여성 중심으로 생겨난 ‘샤오펀훙’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사회주의’에서 애국주의를 가장 최전선에서 실천하는 전사들은 시안에서 도요타 자동차 운전자를 가격하며 ‘애국 행위’라고 말했던 차이양과 같은, 1990년대 이후 출생한 ‘샤오펀훙’(小粉红)이다. 최근 인터넷 등에서 한국과 여러 원조 논쟁으로 마찰을 일으키고,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와 댜오위다오 문제 등으로 촉발된 한국과 일본 상품의 불매운동과 H&M 등에 대한 불매운동을 애국소비운동이라는 ‘정의’의 이름으로 주도하는 부류도 이들 샤오펀훙이다.

2008년 무렵 주로 젊은 여성 사용자가 많은 중국의 한 지방 인터넷 문학논단에서 비롯됐는데, 그 인터넷 누리집 배경이 분홍색인 것에 빗대어 ‘샤오펀훙’이라고 부르게 됐다. 그곳은 곧바로 중국 애국주의 인터넷 전사들의 집결지가 됐고, 이후 샤오펀훙들을 중심으로 인터넷상에서 무수한 ‘애국빠’가 생겨났다.

중국의 한 유명 블로거는 샤오펀훙을 이렇게 정의했다. “그들의 유일한 적아(敵我) 판단 기준은 애국이냐 아니냐다. 또한 반드시 그들의 방식으로 애국을 실천해야만 인정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애국 행위가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그들은 영원히 자신을 가장 정의로운 위치에 놓고, 자신들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국노라는 딱지를 붙인다. (…) 샤오펀훙의 핵심 사상은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이고 중화민족이 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이런 비이성적인 자만감은 이미 극단적 민족주의 특징을 구비하고 있다.”

그러나 샤오펀훙의 ‘극단적 민족주의’는 외교부 대변인 등이 앞장서서 ‘소박한 애국주의’로 포장하고 ‘표현의 자유’라고 옹호한다. 그들은 약 100년 전 베이징대학 훙러우에서 출발해 ‘신시대’의 분수령을 만든 5·4 애국청년들의 ‘희망과 실망의 전환’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이해하고 있을까. 20세기부터 지금까지 중국은 줄곧 애국주의 전성시대다. 그런데 과연 진정한 애국자란 누구이고, 그것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안후이의 산속 마을에서 고성과 삿대질을 하며 ‘애국자’ 설전을 벌이던 그 두 남자는, 내 방 앞에 있던 공용화장실에서 밤새도록 번갈아 가며 토악질을 해댔다. 그날 저녁식사 자리도 나에게는 ‘희망과 실망’이 교차하고 전환하는 시간이었다.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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