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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 (목)

이슈 김학의 '성접대' 의혹

[취재파일] 김학의 사건 ④ 과거사 청산과 '기억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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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에서 적어도 조선시대 이후 전통과 현대를 관통하는 가장 치열했던 정의 담론의 하나로 '과거사 청산'을 꼽을 수 있다. 먼저 조선시대에는 정몽주를 태종이 추증한 것, 4대 사화에서 화를 입은 사림을 신원한 것, 세조의 왕위 찬탈 과정에서 희생된 사육신과 단종 및 삼상(三相)-황보인, 김종서, 정분-을 추복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 현대에도 민주화 이후 과거사 청산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 이후 지속된 한국사에서 공권력의 행사에 의해 저질러진 부정의한 역사를 바로잡는 과거사 청산이 정의론의 가장 중요한 주제라는 점을 보여준다. (...) 과거사 청산은 정치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잘못된 과거사를 공적으로 바로잡음으로써 역사의 주체임을 선언하고 확인하는 과정이다.
- <과거사 청산을 중심으로 본 한국의 민주화와 조선의 유교화>, 강정인 中


역사학자 강정인은 조선시대 정권 교체와 사화 뒤에 잇따랐던 과거사 청산 작업을 연구하며 이를 한국 현대사에 있었던 과거사 청산 작업과 연결 짓는다. 그리고 수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과거사 청산 작업은 당대 정치 공동체 구성원들이 새로운 역사의 주체임을 선언하고 확인하는, 일종의 '기억의 정치' 과정이었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과거사 정리의 과정이 현재의 정치적 의제와 연결돼왔던 건 역사에서 반복돼 왔던 일이다.

어떤 '기억의 정치'였나?



과거사 조사를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과정에는 객관성과 전문성이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 자료 분석을 토대로 조사단원들이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는 개개의 정치적 지향이 영향을 미칠 수 있겠지만, 이 경우에도 전문가로서의 객관 의무를 완전히 저버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과거사 조사와 정리 과정이 조사단 외부의 정치적 의제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반복돼온 사실이기도 하거니와, '과거사'의 의미를 여론과 정치의 영역에서 풍부하게 한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하다고도 볼 수 있다. 때문에 '조사 과정의 정치화'를 비판하는 것과 '조사 과정이 정치적 파장을 낳는다'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다르다. 후자의 경우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을 비판의 목표로 삼음으로서 자칫 정치적 회의와 허무만을 재생산해낼 수도 있다. 그래서 검증과 비판의 방향은 과거사 정리 과정을 통해 '정치성'이 파생되는 현상 자체보다는, 그 '기억의 정치'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들여다보는 쪽으로 향해야 한다. 사실에 기반한 논리가 정치적 의제 형성의 근거가 되는지, 아니면 나뭇잎에 새긴 '주초위왕' 네 글자처럼, 왜곡되고 비틀어진 사실이 정치적 의제 형성의 재료가 되는지가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왜곡 논란 불거진 조사자료



이런 측면에서 김학의 과거사 조사단과 함께 벌어진 우리 사회 '기억의 정치' 과정은 많은 과제를 남겼다. 가장 큰 문제는 이 과정에서 근거로 활용된 공적 문서가 신뢰성을 충분히 담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일부 내용이 언론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며 김학의 과거사 조사에 '검찰 개혁', '적폐 청산'이라는 명분을 부여했던 조사 기록들은 지금 허위·왜곡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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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29일 당시 김학의 과거사 조사단 소속 이규원 검사가 작성한 <윤중천 면담 보고서>에서는 다음 세 가지 대목이 왜곡됐다는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윤중천이 검찰 고위 간부인 김학의, 한상대에게 수천만 원의 현금을 준 적이 있었다는 대목 △윤중천이 과거사 조사 당시 야권 정치인이었던 윤갑근과 알고 지냈으며, 윤갑근이 원주 별장에도 방문했을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 △그리고 윤석열 전 검찰총장도 윤중천과 알고 지냈다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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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4일, 마찬가지로 이규원 검사가 작성한 <박관천 면담보고서>에서도 왜곡 논란이 불거진 대목이 있다. 김학의가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법무부 차관이라는 고위직에 낙점된 배경에는 최서원 (구 최순실)과 김학의 처 사이의 친분이 작용했다는 대목이다.

이 내용들은 모두 어떤 경로로 언론에 유출돼 정치적 의제 강화의 재료로 이용됐다. '조국 사태'를 겪으며 검찰 개혁의 걸림돌로 인식됐던 윤석열 총장이 김학의와 연관되었다는 보도, 김학의 배후엔 적폐의 대명사인 최서원이 자리하고 있다는 보도, 야권 정치인이 김학의를 중심으로 한 적폐 카르텔에 연관돼 있다는 보도 등이었다. 이것들은 모두 김학의 재조사 과정이 '검찰 개혁'과 '적폐 청산'에 이바지하는 일임을 뒷받침하는 용도로 활용됐다.

해당 보도들은 모두 민사 소송 과정에서 손해배상 판결이 내려졌거나, 보도한 언론사가 오보임을 인정함으로써 허위성이 어느 정도 판명됐다. 현재 진행 중인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 (변필건 부장검사)의 수사 과정에서도 면담 당사자인 윤중천, 박관천은 <면담보고서>에 기재된 내용을 부인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규원 검사 측은 SBS 취재진에 "해당 면담보고서가 왜곡됐다는 보도들은 사실과 다르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이규원 검사와 함께 면담에 참여했던 다른 검사 또한 "면담보고서 작성 과정이 정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너무나 많은 물음표가 찍힌 이 문서들은 김학의 과거사 조사 과정과 공명했던 정치적 담론들의 근거로 활용됐다.

이에 대해 '역사의 불길을 지피기 위한 땔감에 불순물이 조금 섞여 들어갔다고 이를 물고 늘어지는 건 꼬투리 잡기일 뿐이다'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 '섞여 들어가도 되는 땔감'의 기준을 느슨하게 하기 시작하면, 이 범위가 무한정 넓어질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야권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훼손된 윤갑근의 명예, 비리 공직자의 아내라는 이유로 무시된 김학의 부인의 인권. 이런저런 이유로 역사의 불길이 연료로 사용할 수 있는 땔감의 대상이 넓어진다면, 먼 훗날 '검찰 개혁'이나 '적폐 청산' 말고 또 다른 역사의 불길이 타오를 때 죄 없는 필부의 인생도 불길의 연료가 돼버릴지도 모른다.

'뇌물'과 '성폭력' 사이…표적을 찾지 못한 '김학의 봐주기' 의혹 규명



치열하지 못했던 조사와 토론 과정도 김학의 과거사 조사가 파생한 '기억의 정치' 과정에 오점을 남겼다. '김학의 사건'에서 대중들이 납득하지 못했던 점들 중 하나는 '왜 논란이 처음 불거진 2013년 당시 김학의를 처벌하지 못했는가?'이다. '이렇게 큰 국민적 의혹에도 검찰과 경찰은 왜 박근혜 정부가 임명한 법무차관 김학의에게 법적 책임을 묻지 못했느냐'는 의문이다. 이런 의문은 '검찰은 왜 애초에 김학의가 받은 성접대를 뇌물죄로 의율하지 못했는가?', '윤중천과 김학의의 특수강간 혐의에 검찰이 불기소 처분한 이유는 무엇인가?'와 같은 구체적 질문들로 뻗어나간다. 그리고 이런 의혹들은 '검찰 개혁', '공수처 설치'와 같은 정치적 의제 설정의 중요한 재료가 되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2013년 당시 검찰 수사 당사자들은 "이유가 있었다"고 말한다. 김학의 사건 1차 수사 당시, 사건을 뇌물 수사를 주로 담당하는 '특수부'가 아닌 '강력부'에 배당하기로 결정한 검찰 관계자는 "경찰에서 사건을 성범죄 혐의로 송치했고, 마약 관련 내용도 들어있었기 때문에 강력부에 배당한 것"이라고 SBS 취재진에게 밝혔다. "처음 배당을 할 땐 검찰 수사가 이뤄지기 전이기 때문에 경찰이 송치한 사건 기록을 토대로 배당을 할 수밖에 없다"며, "뇌물과 관련해 경찰 수사가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는데, 송치된 사건을 특수부에 배당했다면 그것이 오히려 결론을 정해놓고 하는 수사였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당시 서울중앙지검 강력부에서 사건을 배당받아 수사에 참여했던 검찰 관계자 또한 "강력부 사건이긴 했지만 뇌물 혐의에 대해서도 수사를 벌였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윤중천과 김학의가 서로 알지도 못한다고 하는 상태였다"며 "그래도 성범죄와 마약 혐의 등 본안 수사를 거치며 이들이 서로 안면은 있다는 점이라도 밝혀지게 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하지만 뇌물 혐의는 단순히 금품과 향응이 오간 것으로는 기소가 불가능하고 '직무대가성'이 인정돼야 하는데 당시로서는 이를 입증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요컨대 수사의 현실적 어려움으로 인해 뇌물 혐의는 법리적으로 입증하는 데 실패했지만, 의도적 '봐주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SBS가 입수한 <김학의 과거사 재조사 보고서>에도 이러한 의혹을 규명하려는 시도들이 수백 페이지에 걸쳐 기재돼 있다. 보고서는 '뇌물 수사로 확대할 수 있는 진술들이 있었음에도 검찰 수사가 미진했던 측면이 있다' 점을 당시 수사기록을 토대로 나름 꼼꼼하게 지적했다. 그러나 보고서는 '현실적 한계는 있었지만 노골적 봐주기는 아니었다'는 당시 수사 관계자들의 해명을 명쾌히 반박하는 데에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의혹을 규명하기 위한 첫 단추를 제대로 꿰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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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검찰의 '김학의 봐주기 의혹'을 날카롭게 파고들기 위해선 이 사건이 성접대 형태의 '뇌물'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김학의·윤중천의 특수강간이 포함된 '성범죄' 사건이었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의 정리가 필요했다. 김학의-윤중천의 범죄 혐의, 즉 검찰이 '봐주기'를 했다는 혐의를 구체화해야 어떻게 '봐주기'가 이뤄졌다는 것인지 명료하게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윤중천과 김학의 사이에 여성들의 성이 뇌물로 오갔다'는 논리와 '김학의 윤중천이 여성들을 대상으로 특수강간을 저질렀다'는 논리는 자연스럽게 양립하기 쉽지 않은 성질의 것들이었다. 과거사 조사단 활동이 종료된 이후, 검찰 김학의 특수단은 원주 별장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김학의에게는 뇌물수수죄를, 윤중천에게는 성범죄 혐의를 적용해 기소했다. 하지만 윤중천 혐의를 심리한 1심 재판부는 같은 사실에서 뇌물수수와 특수강간이 양립한다는 논리를 납득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공소사실은 김학의가 윤중천의 강간 범행을 전혀 모르는 고의 없는 도구로서, 윤중천의 강간 범행에 이용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검사는 관련 사건에서 김학의에게 위 성관계를 뇌물로 제공했다고 보고 뇌물수수로 기소했다. (…) 윤중천 스스로는 강간을 하면서 검사인 김학의에게 같은 기회에 뇌물을 제공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 설정이다.
- 서울중앙지법 형사33부 윤중천 1심 판결문 中


그럼에도 보고서는 김학의 사건에서 '성범죄'성을 더 중히 봐야 하는지, 아니면 '뇌물성'을 더 중히 봐야 하는지와 관련해 최소한의 논쟁도 벌이지 못했다. 여성들을 '성매매 행위자'로 판단한 [1안]과 '성폭행 피해자'로 판단한 [2안]이 아무런 논쟁도 없이 접점을 찾지 못하고 병존하는 상황 속, 보고서는 '봐주기 의혹'의 대상이 되는 혐의를 정리하는 데 사실상 실패한 것이다. (▶ 관련 취재파일 링크) 이런 상황에서 '봐주기 의혹'을 규명한다는 건 표적을 정하지 못하고 총을 난사하는 것과도 같았다. 실제 보고서에 기재된 '검ㆍ경의 봐주기 의혹'에 대한 지적들은 하나의 탄착점을 형성하지 못하고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다.

조사단 종료 후 이어진 검찰 특수단 수사에서 성접대를 받은 김학의는 뇌물수수죄로 기소됐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뇌물죄 성립의 핵심인 '직무대가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김학의에게 실형을 선고한 2심 재판부도 별건의 뇌물 혐의에 유죄를 선고했을 뿐, 논란의 '별장 성접대' 사건에 대해선 뇌물임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대중들을 분노케 했던 '봐주기 의혹'은 규명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기회를 놓친 채 역사의 장막 뒤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사라진 자리엔 대중들의 의혹과 분노가 만들어낸 각양각색의 신기루들만 자리하게 됐다.

괴물의 방식으로 괴물을 단죄하는 것에 대하여



'김학의 사건'이 촉발한 검찰 개혁 과제는 이런 것들이었다. 검사들이 권력의 눈치를 보며 정치적으로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 수사과정에서 과도한 피의사실 공표로 여론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별건·먼지털이 수사를 한다는 지적,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해 검사들이 충분히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지적 등이다.

이 검찰 개혁의 파도와 함께 출범한 김학의 과거사 조사단 관계자들은 그러나, 그들이 '괴물'이라 공격했던 과거의 검찰과 비슷한 방식을 사용했다. 아니, 어떤 면에선 그 괴물의 방식에서 더 나아가기도 했다. 피의사실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부정확한 의혹이 언론에 유포되었고, 중요 국면마다 기록과 사실보다는 여론에 기대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과정을 기록한 백서조차 남기지 않음으로써 이 모든 일의 책임 소재까지 따지기 어렵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김학의 과거사 조사단이 던진 공을 검찰 김학의 특수단이 이어받았다. 별건 수사가 아니냐는 법률가들의 비판에도 특수단은 모든 혐의 사실을 긁어모아 김학의, 윤중천을 기소했다. 그러나 법원은 김학의의 성접대 뇌물 혐의도, 윤중천의 성범죄 혐의도 도덕적 비난을 할 수는 있을지언정 법적 단죄를 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국민들의 불신은 이제 '법원도 한패'라는 데까지 번지고 말았다. 과거사 청산을 통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보다는, 더 커진 의심만 남게 된 것이다. '괴물의 방식'으로 괴물을 잡겠다고 했던 이들이 초래한 결과는 '신뢰의 폐허'일뿐이었다.
김학의 과거사 조사단을 되짚어보자는 공론화는 또 한 번의 정치적 논란을 낳고 있다. 이미 공론화는 꽤나 정치적인 사안이 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정치적인지 일인지 아닌지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또 한 번 일어나고 있는 '기억의 정치' 과정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이뤄지는가이다. 이 '기억의 정치'가 또다시 비슷한 방식으로 반복된다면,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과거 속에 살아야만 할지도 모른다.

**참고자료
-<과거사 청산을 중심으로 본 한국의 민주화와 조선의 유교화>, 한국정치연구 제28집 제1호, 강정인, 2018,
-[단독] 윤중천 1심 재판부 "강간하며 김학의에게 뇌물? 납득 어려운 설정" 무리한 기소 비판, 경향신문 2019년 11월 27일자, 유설희 기자

▶ '김학의 사건' 취재파일 시리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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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진 기자(bell@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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