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쉽게 바뀔 거라고 생각 안 해요.
사람의 생각이 쉽게 안 바뀌어요.
그건 경험의 결과물이거든요. 그리고 저조차도 제가 어떤 생각을 정리해버릴 때는 보고자 하는 사실과 증거만 보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쉽게 바뀔 것 같진 않아요. 다만 이런 변화의 과정에 쏟는 저와 또 우리 함께하는 사람들의 노력. 그리고 또 이번 공론화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분들. 연대 세력들의 진정성은 평가해주셨으면 좋겠다. 그런 진정성이 평가받는 것만으로도 변화는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고요.
- 박준영 변호사, SBS와 인터뷰 中 -
<김학의 과거사 진상조사 보고서>를 SBS와 한국일보에 공개하고 공론화를 이어가고 있는 박준영 변호사는 최근 잠을 자지 못하는 날이 많다고 한다.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김학의 과거사 재조사 과정이 '공론화' 된 데에는 성공했지만, 이것이 생산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분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 변호사의 말처럼 이 사건이 공론화됐다는 것 자체만으로 세상이 쉽게 긍정적으로 바뀔 리는 만무하다. 공론화에 나선 박준영 변호사의 용기를 응원한다는 반응도 있지만, 공론화의 의도와 정당성, 논리에 대한 비판도 이어지고 있다. 모든 일들이 그렇듯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들은 종종 피로와 허무감을 낳기도 한다.
▼ [단독 인터뷰] '김학의 보고서 공개' 박준영 변호사 인터뷰…"정치적 이유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의 의미를 찾아내자'는 이 사건 공론화의 의미를 놓치지 않으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계속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들이 있다. 박준영 변호사와 함께 '김학의 재조사 사건' 공론화에 참여해온 SBS는 이번 마지막 취재파일에서 공론화가 남긴 과제들을 짚어보고 기록해두고자 한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겐 강했던 법의 역사
'흉악범에게도 적법 절차의 원리는 지켜져야 하고, 아무리 의심스러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명예와 인권은 존중돼야 한다'. 공론화에 나선 박준영 변호사 주장의 핵심 중 하나다. 그런데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수긍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인다. 박준영 변호사 SNS에서 댓글을 통해 비판 의견을 개진하는 많은 사람들은 박 변호사의 공론화 자체가 정의 실현을 지체시키는 일종의 '물타기'라고 말한다. '고위 공직을 이용해 부정을 저질러놓고도 미꾸라지처럼 법망을 빠져나간 인물의 인권을 한가하게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강자에게는 약했고 약자에게는 강했던 부정의한 우리 법의 과오를 바로잡는 게 먼저 아니냐'는 것이다. 박준영 변호사 또한 이러한 사람들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라고 말한다.
Q. 그런데 변호사님의 폭로랑 내용 진행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일종의 불편감을 느끼는 게 뭐냐면, 김학의는 별장에서 업자의 성접대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아니 저렇게 나쁜 사람을, 고위공직 이용해서 성접대를 받고도 법적 단죄를 하지 못한 사람을 재조사하는 과정에서 어떤 세부적인 오류가 있을 수도 있는 건데 그걸 문제 삼는 건 너무하다'는 여론들이 있습니다. 그 지점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A.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요. 내가 법을 배우지 않은 그리고 김학의 전 차관 사건을 잘 모르는 일반 시민이었다면 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왜냐면은 법이라는 것이 강자에게 너무 약했잖아요. 그리고 약자에게 너무 강했잖아요. 그럼 우리의 어떤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그런 역사란 게 있는데, 김 전 차관 사건을 바라보는 그런 시각도 전 충분히 공감합니다.
다만, 행위책임. 자기가 한 행위만큼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겁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 이상의 책임을 추궁당하면 자기가 저지른 잘못조차도 인정하지 않아요. 자신이 저지른 잘못조차도 부정하려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합당한 책임이 그래서 중요한 겁니다. 그리고 이런 원칙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는 겁니다.
- 박준영 변호사, SBS와 인터뷰 中 -
강자에게만 유독 약했던 우리 법의 부정의를 시정하는 것과 '절차적 정의와 객관성이 훼손돼서는 안 된다'는 이 사건 공론화 사이에는 우선순위를 따질 수 없다는 것이 박준영 변호사의 생각이다. 박준영 변호사의 공론화에 참여한 SBS 취재진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절차적 정의의 훼손을 되짚어보는 작업을 우리 법의 부정의가 시정될 때까지 미뤄둬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자에게만 약한 법'이라는 우리 사회의 오랜 부정의를 체감해온 사람들의 분노에도 분명 이유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 공론화 과정에서 우리 수사기관과 언론이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했던 우리 법의 과오를 시정하는 데에는 그간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되묻고 있다. 때문에 김학의 사건 처분에 연루됐던 수사 기관과 보도에 나섰던 언론, 그리고 이번 공론화에 참여했던 이들은 공론화 이후에도 대중들의 이 질문을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책임 있는 기관과 전문가들이 '절차적 정의'를 되짚어보는 공론화 못지않게 '공평하지 않은 법 적용'이라는 부정의의 문제를 시정하는 데에도 계속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김학의 재조사 사건'의 공론화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는, 반쪽짜리에 그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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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생산과 검증
박준영 변호사는 1천200페이지 넘는 <김학의 과거사 재조사 보고서>와 사건 관련 기록을 SBS와 <한국일보> 2개 언론사에만 공개했다. 박 변호사는 "당초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윤중천과 연루됐다는 취지의 오보를 낸 신문사와 공론화를 진행하고자 했으나, 해당 언론사 데스크의 편향된 칼럼을 보고 또 다른 정치적 이용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뜻을 접었다"고 밝혔다. 공적 기관이 아닌 개인으로서, 박 변호사가 민감한 내용이 포함된 사건 기록을 모두에게 공개하는 것에는 너무도 큰 위험부담이 따르기도 했다.
하지만 제한된 자료 공개로 인해 검증의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이다. '사상의 자유롭고 공개적인 시장' 논리에 따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다양한 시각으로 기록을 검증하고, 진실과 허위가 공개적으로 대결하는 과정을 통해 사안의 실체가 더 정확히 드러날 수 있다. 여러 수사기관 개혁 작업에 참여하며 '절차적 정의'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양홍석 변호사(법무법인 이공)의 SNS 글은 이러한 한계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박준영 변호사의 판단을 기본적으로 신뢰하지만 폭로 방식, 내용에 관해서는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히면서 "어쨌든 지금 폭로와 관련해 기록을 본 사람은 박준영 변호사뿐이니 그 판단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렵고, 기록을 제한적으로 2개 언론사에만 제공했으니 기록을 본 사람이 너무 적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자료를 독점하면 그 평가까지 독점할 수 있으니 누구도 박준영 변호사가 틀렸다거나 그 판단에 다른 이견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고도 덧붙였다. 또 "이런 경우 메신저의 신뢰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언론이 메신저를 선의의 화신으로 만들어서 옳고 그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라는 비판도 제기했다.
박준영 변호사는 SBS와 <한국일보>가 상대적으로 진영논리에서 자유로운 언론사라고 판단해 자료를 제공한다고 밝혔지만, 두 언론사 또한 진리의 해석을 독점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이러한 지적에는 분명 생각해봐야 할 점들이 있다. 그런 측면에서 '김학의 과거사 재조사'를 시작했던 기관과 정치세력 등 공적 주체들이 이번 공론화 과정에서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애초에 백서도 생산해내지 못했던 공적 주체들은 박준영 변호사가 불이익을 감수하고 시작한 공론화 과정에서 아무런 입장도, 설명도 내지 않고 있다. 기록 공개와 관련된 부담은 여전히 개인인 박준영 변호사가 짊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이뤄지고 있는 '김학의 재조사' 과정에 대한 수사가 끝나면 관련 기록이 공판 과정에서 일부 제공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조금 늦었더라도 '김학의 재조사'에 참여했던 공적 주체들은 세상에 드러나지 못한 기록의 공론화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
'얼굴들'을 잊지 않으려는 시도
나는 독방의 무료 때문에 시작한 것이기는 하지만, 내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의 연상 세계를 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내 생각의 배후를 하나하나 점검하는 동안 나는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실업'이란 단어에서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은 경제학 교과서에서 읽은 이러저러한 개념이었습니다. 케인스, 맬서스, 유기적 구성, 상대적 과잉인구, 등…… 메마른 경제학 개념들이 연상되는 것이었습니다. '전쟁', '자본', '상품'과 같이 고도의 사회성을 띠고 있는 개념의 경우에도 그것의 본질인 사회관계가 사상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쟁'이라는 단어에서는 최신 무기들이 펼치는 게임 화면이 연상되는가 하면, '자본'에서는 은행 창구가, '상품'에서는 백화점 쇼윈도가 연상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정서적 공감의 원초가 되는 '사람'이 연상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처럼 나의 의식 속에 사람의 얼굴이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을 때의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고작 책 몇 권을 들고 척박한 간척지에 서 있는 외로움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회과학도에게 요구되는 냉철한 이성이 따뜻한 가슴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 것이라면 이처럼 사람이 배제된 나의 관념 세계는 참으로 창백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읽고 생각한 것 심지어 내가 온몸으로 겪은 것마저도 껍데기만 얻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연상 세계에 사람의 얼굴을 하나하나 심어 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연상 세계를 사람들의 체온으로 채우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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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을 통해 공론화 작업에 계속 참여하고 있는 박준영 변호사는 그제 위와 같은 신영복 선생의 글귀를 인용했다. 사회과학적 공론화 과정에서 추상적 개념에 매몰되지 않고, 이 개념과 연관된 '사람의 얼굴'을 놓치지 않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공론화 과정에서의 토론과 논쟁은 누가 이기고 지고 하는 '겨루기'가 아닌, 결국 '사람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놓치지 말라'는 신영복 선생의 지적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난점은 이 '사람의 얼굴'을 하나하나 심어 가는 과정이 꽤나 복잡한 일이라는 데 있다.
박 변호사는 신영복 선생의 글을 인용한 위 페이스북 글에서, 자신이 '양심'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땐 당시 조사단에 참여했던 A 검사의 '얼굴'을 연상한다고 적었다. 2019년 김학의 재조사 당시, 조사단원으로는 유일하게 모든 기록을 읽었고, 보고서의 근거 없는 수정 시도에 끝까지 반대했던 A 검사 '얼굴'을 통해 '양심'의 가치에 대해 생각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이것은 박준영 변호사 입장에서의 기억이다. 현재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다른 조사단원들 입장에서는 A 검사를 다르게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의 얼굴에서 '양심' 외에 다른 단어들을 떠올릴 수도 있다. 이처럼 공론화 과정에서 관련 인물들의 얼굴을 객관적으로 그려낸다는 건 논리로 하는 논쟁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신영복 선생의 지적으로 돌아가자면, 사회과학적 공론화 과정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정확히 그려내고 떠올리고자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공론화 과정에서 그려진 사건 관련자들의 '얼굴'은 다양한 개념의 연상작용들을 만들어낼 것이고, 그것이 곧 공론화가 낳는 결과물의 질적 수준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사건 공론화 과정에서 계속 놓쳐서는 안 되는 얼굴들이 있다. 바로 이 사건 등장 여성들의 복잡다기한 얼굴이다. 사건 기록의 어떤 대목에서는 허위 피해사실을 주장한 '무고자'로서의 모습을, 또 다른 대목에서는 성 착취 피해를 호소한 '피해자'로서의 얼굴을 하고 있는 여성들 말이다. <김학의 과거사 재조사 보고서>에는 이 여성들 얼굴의 단면들이 아귀가 맞지 않는 퍼즐 조각처럼 흩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조각들을 끊임없이 맞춰보려는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그것은 이 사건 등장인물들의 인간성을 더 정확히 파악해나가려는 노력이기도 한데, 이들을 규율한 법과 절차가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 법과 절차가 어떤 방향으로 변해야 하는지 생각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인간성'에 대한 면밀한 고찰이 우선돼야 한다.
권력과 자원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세상의 다양한 압력에 짓눌리며 때로는 피해자로, 때로는 가해자로 살아야만 하는 일들은 오늘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들의 행위와 삶에 대해 정확히 판단하고, 또 적확한 처분을 내리기엔 우리의 법은 너무 성기거나 낡은 도구였는지도 모른다. 인간성을 규율하는 법이 더 정교해지기 위해서는, 그 법을 만드는 사회의 '인간성'에 대한 이해도부터 정밀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학의 재조사 사건' 공론화 이후 우리 법의 한계와 발전을 고민할 때,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를 오가며 살아야 했던 이들의 얼굴을 끊임없이 구체화하려는 노력은 그래서 중요하다.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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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김학의 사건 ① '김학의 사건'은 어떻게 지금까지 왔나
[취재파일] 김학의 사건 ② 착취와 이용 사이, 토론 없는 평행선
[취재파일] 김학의 사건 ③ '여론의 생산적 에너지화' 위한 전문가의 역할
[취재파일] 김학의 사건 ④ 과거사 청산과 '기억의 정치'
원종진 기자(bell@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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