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투기 사태 촉발한 주택공급 기능은 그대로
흔들림 없는 공급, 국민 눈높이 맞는 혁신 갈림길
서울 강남구 한국토지주택공사(LH) 서울지역본부 로비 유리창에 LH 로고가 붙어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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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를 해체 수준으로 환골탈태시키겠다고 큰소리쳤지만 발표가 임박한 혁신안은 이에 못 미칠 전망이다. 직원들의 땅 투기 사태를 촉발한 공공택지 개발 등 핵심 기능은 LH에 그대로 두는 혁신안으로 기울었다.
눈 가리고 아웅 식 ‘맹탕안’이란 비판을 부를 게 뻔해도 신속한 주택 공급과 국민 눈높이 부합이란 대의명분을 동시에 충족할 수 없다는 딜레마 때문이다. 정권의 명운이 걸린 집값을 잡기 위해선 공급이 필요한데, 당장 맡길 기관이 마땅치 않다는 게 정부 입장에선 난제다.
24일 기획재정부와 국토교통부 등에 따르면 정부는 3, 4개의 LH 혁신안을 마련했고 이번 주 중에 여당과 당정 협의를 진행한다. 당정 협의가 원활하게 이뤄지면 이달 안에 LH 혁신 최종안이 발표될 예정이다.
현재 유력한 안은 1개 지주회사에 2, 3개 자회사를 두는 방식이다. 지주사는 자회사를 관리·감독한다. LH는 자회사로 기존 핵심 업무인 주택, 토지, 도시재생 등 주택 공급 기능을 유지한다. 주거 복지와 주택관리, 상담 등 비핵심 사업은 또 다른 자회사가 담당한다. 지주사의 감시로 땅 투기 사태 재발을 막고 조직 분할로 내부 정보에 접근 가능한 인력을 최대한 줄이겠다는 의도다.
정부는 당초 LH 통합 이전처럼 택지 개발과 주택 건설 업무를 분리하는 방안도 검토했지만 3기 신도시 조성과 ‘2·4 주택 공급대책’을 차질 없이 추진하기 위해 본연의 기능을 남기는 방향으로 돌아선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택지 조사 기능을 한국부동산원, 택지 개발을 지자체에 넘기는 방안도 검토했지만 이는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결론낸 것으로 파악된다.
대대적인 혁신을 기대한 국민 눈높이에는 한참 못 미치는 분위기다. 땅 투기 사태로 국민적 공분을 샀던 LH는 최근 주택매입임대 사업에서도 비위 행위가 불거져 지탄을 받고 있다. 주요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이건 해체가 아니라 해부다” “해체를 하라니까 그룹을 만들고 있다” “말로만 해체지, 눈속임 조직 비대화다” 등의 성토가 쏟아진다.
4·7 재·보궐선거에서 성난 민심의 심판을 받은 민주당으로서는 또 한 번 역풍을 맞을 수 있어 이번 혁신안을 특히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김부겸 국무총리는 “국민들의 요구는 LH 임직원 등의 부동산 투기를 일벌백계해 달라는 것”이라며 강도 높은 대책 마련을 촉구했고, 여권 내부에서도 국민의 분노를 달래는 가시적인 성과가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정작 문제는 LH를 대신할 주택 공급 전문기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정부나 여당은 ‘흔들림 없는 주택 공급이 우선인지’, ‘국민 눈높이를 맞추는 게 우선인지’를 두고 고심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졌다. LH 혁신안 발표가 지연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딜레마와 무관치 않다는 게 부동산 업계의 시각이다. 함영진 직방 빅데이터랩장은 “개발 예정부지 발굴이나 지구지정, 공공분양 등 LH가 수행해왔던 기능과 노하우가 있어 공급 대책에서 바로 배제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LH 사태를 촉발한 본질은 조직 구조가 아니라 내부 도덕성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LH 직원들의 땅 투기가 불거진 것은 비위 행위가 발생했을 때 내부적으로 덮으려고 했던 기존 관행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며 “잘못된 문제는 확실히 공론화해서 무거운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지섭 기자 oni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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