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먼' 신희숙씨…7살 때 입양·언론인 출신
발레리 끌레망(Valérie Clément, 한국명 신희숙). ©신정숙 통신원 |
(그뤼에르=뉴스1) 신정숙 통신원 = "나는 한국의 무당과 달라요."
그녀는 처음 자신을 소개할 때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무당처럼 작두에 올라가 춤을 추거나 (출 수도 없고) 화려한 옷을 입지 않는다. 신령을 모시는 제단도 두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들처럼 특별한 능력으로 힘들고 아픈 이들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치료사이자 신의 전령사(또는 안내자)와 같다고 했다.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온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를 주고, 나를 이끌어주는 주변의 에너지와 안내로 그의 세계로 들어가 어디서 고통과 트라우마가 시작됐는지 들여다보는 거예요. 그 사람 인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또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내가 받은 정보를 해석해주는 거죠."
발레리는 몇 년 새 급증하고 있는 번아웃 또는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무기력증과 우울증을 겪는 이들을 돕고 있다. 실제로 그녀 또한 번아웃으로 일 년 넘는 기간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그녀는 종종 심리치료사, 자연요법 치료사, 그리고 정골의사들과 협업하여 사람들의 치유를 돕고 있다.
한국의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옆에서 장구나 다른 악기를 치면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달리 발레리는 혼자서 모든 걸 한다.
그녀는 시베리아와 북아메리카의 샤먼들처럼 북을 이용해 특별한 에너지와 연결한다. 이들이 사용하는 북들은 실제 생활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재료로 아주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도구들이다. 예를 들면 남아메리카 샤먼들은 주로 약초를 이용하고, 북아메리카 샤먼들은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북을 사용하는 것이다. 북을 두드려 의식을 가다듬고 소리가 점점 고조되면 뇌의 상태가 변화되면서 라디오가 주파수를 잡는 것처럼 어느 순간 초집중상태로 빠지는 것이다.
그녀의 방 한쪽 벽에는 다양한 형태의 북이 걸려 있는데 이 북들 가운데 핀란드를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온 것도 있고 발레리와 남편 필립이 함께 만든 것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북을 사용하는 이유는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어디서 왔는지 그들이 뿌리, 종교나 신념에 따라 에너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에게 맞는 치료를 위해 그때그때 북을 선택한다. 반면 그녀는 치료를 위해 약초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방안엔 치료 전후의 기운을 환기시키기 위해 태운 은은한 약초 냄새가 평온함을 주고 있다.
치료할 때 사용하는 다양한 북. © 신정숙 통신원 |
◇번아웃으로 심한 우울증 앓고 샤먼의 길로 들어가다
스위스 신문 <르마땅(Le Matin)>의 저널리스트였던 발레리는 어느 날 번아웃 상태에 빠지게 되어 일 년 반을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을 만나면 몸이 아팠고,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부정적인 기운을 심하게 느껴 외출조차 할 수 없었다. 남편과 아들이 있었지만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고 죽고만 싶었다. 우울증으로 일년 반을 보내고 있을 무렵, 그녀는 3주간 마음돌봄 클리닉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중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2회차 이완프로그램을 진행하던 도중 한 동물이 나타났고 나는 마치 그 동물인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땐 내가 먹은 약 때문에 환상에 빠졌다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그다음 회차 때 또 다른 동물이 나타났고, 세 번째로 같은 경험을 한 후 미칠 것 같았어요. 그래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담당자에게 물어봤죠. 내 얘길 들은 그녀는 내가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하는 능력을 가졌다며 흥분했고 나는 그녀가 무슨 얘길 하는지 몰라서 다시 물었는데 '당신은 샤먼입니다' 라고 한 거예요."
이후 클리닉에 있는 심리치료사와 의사도 그녀에게 같은 말을 하면서 직계가족 중에 샤먼이 있었을 테니 확인해 보라고 했다. 발레리는 샤머니즘을 수련하는 스위스 여인을 찾아가 다시 물었고, 그녀가 샤먼을 해야 할 차례가 되었고 앞으로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아프고 고통받는 사람을 돕는 것이라는 조상의 메시지를 받았다. 선택할 수도 없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에 힘들었지만, 그렇게 샤먼이 되는 길을 걸어가게 됐다.
샤먼의 길로 들어선 일 년 동안 신들이 그녀를 시도때도 없이 찾아왔다. 신들은 그녀를 찾아와 샤먼의 길을 계속 갈 수 있도록 했다. 그녀는 한국의 가족 중 아마도 아버지쪽 조상 가운데 무당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고 했다. 지금의 그녀에게 완벽한 장소였을 수도 있는, 어린 시절 산 위에 주변의 계곡과 폭포와 함께 풍경 같았던 큰아버지집을 좋아했었고 지금도 그곳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발레리가 신병으로 이 길을 들어서기 전엔 아무런 징후도 없었을까? 그녀가 저널리스트로 일을 할 때도 그랬고 그전부터 예지력이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미스 스위스의 대회가 열렸던 어느 해 대회 시작부터 누가 1위가 될지 알았고, 어릴 때부터 사람들의 운명이나 어떤 일들의 결과가 보였다고 한다. 그녀는 이러한 특별한 능력이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가지고 있어서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해 한 번도 의문을 가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 아니고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했던 이 일을 한 지 11년이 된 발레리의 삶은 행복할까?
"처음 일 년은 너무 싫었죠. 내가 선택한 게 아니니까. 난 내 일을 계속하고 싶었거든요. 당시 나는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재취업을 위한 교육을 받아야 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나를 담당하던 실무자조차도 나에게 샤먼이 되는 게 맞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나에게 지원을 해주겠다고 했죠. 난 일 년 동안 서너 번의 주말 연수를 무속 입문식을 하는 재단을 통해 받았어요. 그 재단은 한국처럼 부모와 자식의 1대 1 관계가 아닌 한 명의 마스터가 약 서른 명의 학생에게 연수를 하는 방식이었죠. 실제로 그들은 샤먼이 아니고 샤먼이 되기 위해 연습하는, 일명 샤먼 연습생 같은 거예요. 타고난 게 아니에요, 스위스에선 대부분이 이런 사람들이에요."
◇아픈 이들이 나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
발레리는 자신은 치료사가 아니라 치료를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한다.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스스로 치유해서 회복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그녀는 우리 모두에겐 스스로 치유할 힘이 있는데 그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때 자신과 같은 사람이 옆에서 도와주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라고 한다. 그래서 '치료'를 끝내고 그녀의 방을 나서는 사람들이 웃으면서 행복해하며 떠날 때가 그녀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며 활짝 웃었다.
처음엔 달갑지 않았던 자신의 일을 점차 받아들일 수 있었던 힘 중 하나는 가족의 이해와 협조였다. 당시 아들은 세 살이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남편은 무속에 대해 전혀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아내를 예전과 다름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이 아꼈던 공간인 와인 창고를 그녀를 위해 내어줬다. 지금 발레리는 이 공간에서 일을 하고 있다.
한국명 신희숙. 그녀는 오래전 자신의 한국 이름의 뜻을 지인에게 물었는데 그 의미가 '기쁨과 아름다움'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달갑지 않았던 운명이었지만 받아들이면서 어쩌면 기쁨과 감사(?)로 샤먼의 삶을 살라는 뜻이 아니엇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이후 늘 웃으며 일하고, 즐겁게 살고 있다는 '희숙' 씨. 그녀의 한국 이름을 자신의 팔에 새겨 넣은 그녀의 남편. 아내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인 그의 사랑을 확인하는 징표가 아닐까.
아내의 이름을 자신의 팔에 새긴 필립(Philipe). © 신정숙 통신원 |
◇"난 버려지지 않았어요."
발레리는 1975년 일곱 살에 스위스로 입양되었다. 생후 6개월에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아버지의 재혼으로 해외입양단체를 통해 스위스로 오게 되었다. 아버지는 입양을 보낼 수밖에 없는 사정을 설명한 후 그녀에게 동의 여부를 물었고, 그녀는 입양을 가겠다고 대답했다. 스위스로 떠나는 날 아버지는 공항까지 그녀와 함께했다. 당시 다른 고아 어린이들과 함께 입양 비행기에 올랐는데, 유일하게 그녀의 아버지만이 공항에 나왔다.
"난 버려지지 않았어요.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와 함께해준 아버지 덕분에 그런 감정은 갖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이혼 후 힘든 상황에도 나에게 잘해줬어요. 다정한 아빠였죠. 예쁜 옷에다 책가방까지 새것으로 사서 나를 보내줬어요."
스위스에 도착한 발레리는 친자녀가 셋 있는 가정의 막내로 입양되었다. 입양 전 한국에서 학교를 일 년간 다녀서 이미 한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덕분에 스위스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한 달 만에 불어를 익혔고 빠르게 이곳 생활에 적응했다. 당시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 지조차 몰랐던 이곳 사람들에게 그녀는 낯선 존재였다. 그러나 입양아버지와 학교 선생님 덕분에 비교적 어렵지 않게 스위스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다. 스위스 아버지는 한국의 아버지처럼 그녀에게 다정하고 친절했지만, 반대로 스위스 어머니는 그녀를 처음부터 줄곧 거부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학교에서 상위권을 유지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고 하니 양쪽 부모의 온전한 사랑을 받진 못해도 한쪽의 지극한 정성과 사랑도 그녀에겐 큰 버팀목이 된 건 아닐까.
◇"가족들과 함께 한국에 꼭 가고 싶어요."
발레리와 필립. © 신정숙 통신원 |
"한국의 아버지 소식이 궁금해서 찾았지만, 아버지와 나는 어긋났어요. 아버지가 나를 찾으려고 뿌리찾기 단체에 연락을 했을 땐 그 단체에서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6개월 후 내가 아버지를 찾으려고 단체에 연락을 했을 땐 아버지는 관광비자로 미국에 가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어요. 아마도 실종된 것 같다고 했죠. 그 이후에도 한 번 더 아버지를 찾으려고 한국에 있는 단체를 통해 연락을 했지만 한국에 계시지 않았어요. 미국으로 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던 거예요."
요즘 같았다면 아버지를 더 쉽게 찾지 않았을까.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런 아쉬움이 아버지에게 전달되었을지 아니면 그녀의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을지, 발레리는 샤먼의 길을 가게 되면서 아버지를 만났다고 했다.
"어느 날 한참 집중된 상태에 있을 때 아버지가 나타나셨어요. 아버지는 자신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어요. 아버지한테 남편과 아들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안타깝다고 했더니 아버지는 이미 다 봤다고 하셨죠. 나도 그럼 됐다고, 사랑한다고 대답했어요. 그걸로 된 거죠, 뭐."
그 후 그녀가 연락했던 한국의 단체에서 친엄마도 찾고 싶냐고 물었지만 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녀에게 엄마는 한국에 있을 때 서너 번 정도 만났던 것만 기억에 남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녀가 한국을 떠날 때 재혼해서 얻은 아기를 안고 마지막 인사를 나눴던 엄마를 기억할 뿐이다. 발레리는 엄마와의 어떤 연결감도 없고, 엄마는 단지 자신의 인생을 선택했을 뿐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한국에 남아 있는 가족은 없지만, 발레리는 남편과 아들에게 자신이 태어난 곳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작년 스위스에 온 지 처음으로 한국으로 갈 계획을 세웠지만 예기치 못한 코로나로 계획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가 종식되고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게 되면 그때 꼭 한국에 가고 싶고, 자신이 알고 있는 한국의 무당 박승미 씨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일곱 살 소녀였던 신희숙이 45년이 지나 발레리 끌레망 아줌마가 되어 한국을 방문하게 되는 날 그녀의 반응은 어떨까? 45년의 긴 세월을 뛰어넘어 그녀가 간직한 추억의 장소를 찾아낼 수 있을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녀의 한국 방문이 기대된다.
sagadawash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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