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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매경데스크] 부(富)의 이전, 숨통 틔워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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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필자가 신접살림을 차린 곳은 서울 신당동 24평형 아파트였다. 2002년에 2억원 안되게 사들인 기억이 난다. 입사 후 열심히 모은 돈에 은행 대출을 합쳐 간신히 살 수 있었다. 4년 후 처분하긴 했지만 이 아파트의 현 시세는 10억원을 훌쩍 넘고 전세도 5억원 이상이다. 젊은 직장인이 자력으로는 매입하기 힘들 만큼 서울 아파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베이비붐 세대는 고도 성장기의 과실을 꽤나 향유했다. 일생 동안 부동산을 통한 자산 증식의 기회가 몇 번씩 찾아온 덕분이다. 반면 우리의 2030세대는 자산 증식 사다리에 오를 기회가 좀처럼 없다. 저출산·저성장의 늪에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젊은이들은 내 집 마련의 꿈을 잃은 채 코인판을 전전하기도 한다.

경제적 역동성이 강점이었던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합계출산율이 가장 낮은 나라로 전락했다. 경제가 활력을 잃고 가라앉고 있다는 위기 신호는 도처에 깔려 있는데 정부가 '하인리히 법칙'을 놓치고 있는 느낌이다.

모 시중은행 WM센터장은 "자녀에게 증여해주려는 고객 문의가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한 번에 1억원씩 넘겨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성인 자녀 1인당 5000만원까지 절세 혜택이 가능한데, 나머지 5000만원은 약 500만원의 증여세를 감수하고 물려준다는 얘기다. 자식에게 수억 원을 지원해주면서 신고를 안 하는 사례도 부지기수다. 잠재적 범법자가 늘고 있는 셈이다.

노년층에 축적된 부를 자녀 세대로 내려보내 경제 활력과 출산율을 제고하려는 선진국들의 시도는 진작부터 있었다. 상속세 최고세율 70%를 고수했던 스웨덴이 2004년 상속세를 전면 폐지하는 등 OECD 회원국 중 14곳이 상속세를 폐지하거나 자본이득세 등으로 전환했다.

상속세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일본도 '부(富)의 이전'을 촉진하기 위해 넉넉한 증여 공제 한도를 부여하고 있다. 주택 취득 자금에 대한 공제는 최대 1200만엔, 교육자금에 대해선 1500만엔까지 무상 증여가 된다. 부모 세대의 부를 자녀에게 이전해 경제 활력을 높이고 결혼, 육아, 교육을 촉진하려는 포석이다. 반면 7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5000만원의 증여 공제 한도는 한국의 경제 규모와 집값 급등세를 감안할 때 현실적으로 작은 액수다.

세제 혜택을 통해 소비심리와 부의 이전을 자극하는 건 한국 경제의 역동성을 키울 수 있다. 돈이 제대로 돌아야 경제에 온기가 살아나는 법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한국의 상속세율(최고 50%)은 20년 넘게 바뀌지 않았다. 기업 경영권을 승계할 때 최대주주 지분에 대해선 20% 할증이 적용돼 최고 60%가 된다. 가업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게 너무 고달파 사업을 중간에 접거나 해외로 자산을 옮기겠다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건 분명히 정상이 아니다. 미국 대도시에 집을 사고 한국에선 전월세로 살고 있다는 외국계 회사 임원들도 부쩍 늘었다고 한다. 부유층의 부를 한국에만 가둬두는 건 불가능하다. 자본의 국경이 허물어진 글로벌 시대에는 여차하면 해외로 돈이 빠져나갈 여지가 크다.

증여가 부의 대물림과 자산 불평등을 조장한다는 불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짚고 넘어갈 점은 '증여·상속세=부유세'라는 공식이 더 이상 성립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서울 아파트의 평균 매매가격은 12억원을 육박한다. 일반적으로 10억원을 초과하는 아파트는 상속세 대상이니 웬만한 서울 아파트 소유자는 상속세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상황이 이런데도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상속세율과 과표구간 조정에 여전히 신중한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불평등을 조장한다는 시선을 의식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국가 운영의 큰 틀에서 상속·증여세 부담을 낮추는 게 경제적 효용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20여 년 묵은 상속세제로 부의 재분배를 실현하겠다는 생각은 낡은 유물이다.

[황인혁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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