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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눈물이 나면 순천으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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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이 길이다. 끝까지 따라가라 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얼어붙은 눈길 위로 걸음을 내딛기가 쉽지 않았다. 매섭게 후려치는 바람을 앞세워 추위도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 저 길 끝에 나의 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경향신문

최준영 책고집 대표


17세의 조광조는, 대사간 양희지가 써준 소개장을 가슴에 품고, 무오사화에 휘말려 함경도 희천에 유배되어 있는 한훤당 김굉필을 찾아나선다. 앞의 글은 한겨울 추위를 뚫고 험난한 길을 헤쳐 스승을 찾아 나선 소년 조광조의 행보를 묘사한 <조광조 평전>(이종수 지음, 생각정원 펴냄)의 한 대목이다.

어렵사리 사제가 된 두 사람의 연은 길게 이어지지 못한다. 김굉필이 희천에서 승평(지금의 순천)으로 이배되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 짧은 만남과 인연은 조광조의 정신 깊은 곳에 큰 족적을 남겼으니, 훗날 그가 ‘도학(동방이학)의 계보를 확립하는’(최연식 저, <조선의 지식계보학>) 계기가 되었음이다. 김굉필(도학의 계승자, 같은 책)을 사사한 조광조는 특히 문장을 탐하는 사장(詞章)보다 경학(經學)에 마음을 둠으로써 소학파의 외길을 걷게 된다. 이는 조광조가 문학으로서의 학문 대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뇌하는 철학으로서의 학문에 천착하였음을 의미한다. 처세와 입신에 매몰되어 버린 오늘날의 학문 세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순천시에는 김굉필(金宏弼)과 조위(曺偉)를 기리는 금석각 비, 임청대가 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함경도 희천으로 유배됐던 김굉필은 희천에서 조광조를 제자로 받아들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순천으로 이배된다. 임청대는 귀양살이하던 김굉필과 조위가 옥천서원(호남 최초의 사액서원) 근방의 계곡을 벗 삼아 소일하던 곳에 세워진 금석각이며, ‘임청대(臨淸臺)’라는 글자는 이황(李湟)이 썼다. 임청대에는 조선전기 사화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으며 당시 유배되었던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엿보게 한다.

강의를 빙자하여 방방곡곡 떠돌아다닌 지 이십년이다. 내 딴엔 일이라지만 실은 남루한 인생방황에 다름 아니다. 일과 방황에는 차이가 있다. 일은 수지타산을 따지지만 방황에는 조건이 붙지 않는다. 일에는 정해진 기한이 있지만 방황은 기약이 없다. 일은 약속된 장소에서 예정된 사람들과 만나지만 방황은 정처 없이 떠돌며 느닷없이 만나고 난데없이 헤어진다.

순천과 인연을 맺은 지도 얼추 십여년이나 되었다. 유난히 순천 강의가 잦았다. 뒤늦은 공부가 가뭇없이 차올라 강단에 서기만 하면 사자후를 토하곤 했다. 와중에 순천시립도서관의 시민교육 담당자에게 얻어걸렸다. “큰 기대 없이 초대했는데 강의는 쪼깐 하대요”가 당시 담당자였고 지금은 친구로 지내는 이의 저렴한 칭찬이다. 그렇게 순천에 발을 들였다.

이즈음에도 순천에 연속 강의가 있어 이곳저곳을 해적해적 떠돌곤 한다. 습관적으로 가는 곳은 순천만 습지와 일몰 시간에 맞춰 오르는 용산 전망대다. 예의 고요하고 아스라한 석양의 붉은 기운을 좇다 보면 그새 어둠에 떠밀려 돌아오곤 한다. 승주의 고찰 선암사에는 끝을 알 수 없을 만큼의 깊이로 다가오는 풍경이 있다. 시인에게도 순천은, 선암사는 그렇게 다가왔었나 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정호승의 시 ‘선암사’)고 노래하니 말이다.

모질고 모진 2년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의 시대를 간난신고 건너왔다. 더 이상 피하고 움츠리기만 할 순 없다. 어쩌자고 가을이다. 가을도 저물고 있다. 단풍구경이라도 좋겠다. 바닷바람을 맞는 일이라면 더 좋겠다. 내게 어딘가를 권하라면 지체 없이 순천이다. 순천만 습지와 선암사와 낙안읍성을 차례로 둘러보시라. 그러고도 마음이 허전하거든 임청대를 찾아 김굉필과 조광조의 정치한 학문적 기개를 되새겨 보시라.

최준영 책고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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