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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사설] 사죄 없이 오욕 남기고 떠난 노태우 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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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김영삼 민주당 총재(왼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오른쪽)와 청와대에서 긴급 3자회동을 갖고 3당 합당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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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씨가 26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대통령 재임 당시 북방외교와 남북관계 등에서 적잖은 기여를 했지만, 그의 죽음을 흔쾌한 마음으로 추모할 수 없는 것은 신군부의 12·12 권력 찬탈과 5·18 광주 시민 학살 등 전두환 독재정권 당시 그가 저질렀던 죄과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이 밖에 미진했던 ‘5공 청산’과 천문학적 규모의 비자금 조성 등도 오점으로 기록돼 있다.

물론 그가 재임 기간 세계적인 탈냉전 추세에 맞춰 북방외교와 남북관계에서 새 지평을 연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공적이다. 무엇보다 1988년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선언)과 함께 시작된 소련·중국 등 공산권 국가와의 수교,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체결과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등은 그의 결단이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일이다. 토지공개념제 도입과 대규모 주택 공급으로 서민 생활 안정과 중산층 확대를 도모한 것도 평가할 만한 대목이다. 같은 군인 출신임에도 전임자 전두환과는 달랐던 유화적인 스타일은 한국 사회의 탈권위주의화와 문민정부 출범에도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면 이후 보여준 행보도 전두환과는 사뭇 달랐다. 추징금 납부를 거부하고 잊을 만하면 망언을 일삼아온 전두환과는 대조적으로 외부활동을 삼가며 자숙하는 모습을 보였다. 법원이 선고한 추징금도 2013년 완납했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에 그가 드리운 짙은 그늘은 이런 긍정적 평가를 가리고도 남는다. 무엇보다 신군부 실세로서 자신 또한 책임이 무거운 1980년 5월의 학살과 관련해 그는 광주 시민과 국민에게 한번도 직접 사죄하지 않았다. 2011년 펴낸 <노태우 회고록>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광주 시민들이 유언비어에 현혹된 것이 사태의 원인이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아들 재헌씨가 2019년 이후 여러 차례 광주를 찾아 피해자들과 유족들에게 사죄를 했지만, ‘대리 사죄’로는 온전한 용서를 구할 수 없다.

정치권 일부와 사회 일각에서 재임 시절의 성과와 국민 통합의 필요성을 들어 그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르고 국립묘지에도 안장하자는 주장이 고개를 드는 분위기다. 결코 안 될 일이다. 화해와 용서는 온전한 반성과 사죄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두환의 사례를 통해 분명히 보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그저 ‘자연인 노태우씨’의 죽음을 조용히 애도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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