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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단독] ‘발전실 CO₂ 소화설비 필수’ 낡은 규정에 질식사고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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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 소방가스 누출 사건으로 본 제도 허점

사고 건물 다른 층엔 유해성 적은

‘할로겐화합물 소화설비’ 설치 반면

유류 있는 탓 사고층만 CO₂ 비치

시행사 “당초 모든 층 할로겐 요청

소방청 안전관리 기준 따라 변경”

최근 10년간 누출사고로 89명 사상

“최신 기술 반영 안된 17년 전 기준

인체 안전·소화 효능 따져 개정을”

세계일보

지난 26일 서울 금천구 가산동 가산메트로지식산업센터 소화약제 가스 누출 사고 현장 감식을 위해 경찰, 소방,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관계자들이 건물 내부로 들어가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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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산화탄소 소화설비의 약제 누출 사고로 21명의 사상자(3명 사망)가 발생한 서울 금천구의 한 신축공사 현장 건물 15개 층 중 사고가 난 층에만 이산화탄소 소화설비가 설치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공사를 맡은 업체는 애초 모든 층에 상대적으로 유해성이 적은 소화설비를 설치하려 했지만, 오래전 만들어진 소방청 안전기준 탓에 이산화탄소 소화설비를 설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해당 규정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현행 규정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27일 세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 23일 사고가 발생한 금천구 가산메트로지식산업센터 건물 15개 층(지하 5층·지상 10층) 중 14개 층에는 할로겐 화합물 소화설비가, 사고가 난 지하 3층에는 이산화탄소 소화설비가 각각 설치돼 있었다. 이산화탄소 소화설비는 실내의 산소 농도를 내리는 ‘질식 작용’ 강도가 할로겐 화합물 소화설비보다 커 상대적으로 위험한 소화설비로 평가된다. 공하성 우석대 교수(소방방재학)는 “이산화탄소는 가스계 소화약제 중 질식 위험이 가장 높고, 할로겐 화합물 소화설비가 상대적으로 더 안전하다”고 설명했다.

시행사 측은 소화설비 설계업체에 관련 의뢰를 하면서 전체 층에 할로겐 화합물 약제를 사용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설계업체는 “‘위험물 안전관리에 대한 세부기준’ 때문에 지하 3층 발전실에만 이산화탄소 소화설비를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소방청이 고시하는 위험물 안전관리에 관한 세부기준에 따르면 경유 등을 포함한 제4류 위험물(인화성 액체)이 저장된 장소(발전실 등)는 방호구역 체적이 1000㎥ 이상인 경우 소화가스 물질 중 이산화탄소만 사용해야 한다. 요청대로 모든 층에 할로겐 화합물 소화설비를 설치하려 했으나 위험물 안전기준을 지켜야 해서 사고가 난 곳에만 이산화탄소 소화설비를 설치했다”고 밝혔다.

해당 규정은 과거 이산화탄소 가스가 유류 화재에 대응하는 데 가장 적합한 물질이라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경유가 비치돼 있어야 하는 발전실 특성상 유류 화재 발생 가능성이 높은데, 유류 화재는 물을 뿌리면 화염면이 확대돼 산소분율을 낮춰 질식시키는 이산화탄소 가스를 사용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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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 규정이 17년 전 만들어진 후 개정되지 않아 인체에 안전하고 효과적인 소화 기술이 개발됐음에도 현장에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화설비 설계업체 관계자는 “과거에는 유류 화재 시 이산화탄소 가스만 사용했지만 최근에는 대체 소화약제가 많이 나왔다”며 “이산화탄소 설비는 안전사고 우려가 커 공장이나 연구실이 아닌 일반 건물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추세”라고 말했다. 이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기준 때문에 더 안전한 소화설비를 두고도 위험성이 높은 소화설비를 설치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안전을 위해 만든 규정이 오히려 안전을 위협하는 셈이다.

실제 최근 10년간 이산화탄소 소화약제 누출사고로 사상자가 89명(사망 9명·금천구 사고 포함) 발생하는 등 관련 사고가 잇따라 기준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박재성 숭실사이버대 교수(소방방재학)는 “과거 법이 기술 발달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이제는 소화의 효과성 외에 인체 유해성도 따져서 기준을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일보

지난 26일 서울 금천구 가산동 가산메트로지식산업센터에서 경찰, 소방,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화재진압용 소화약제 가스 누출 사고 현장 감식중인 가운데 사고현장 인근인 지하공간에 작업자들이 쓰던 헬멧 등 안전장비가 놓여져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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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청 관계자는 “해당 기준은 인체 유해성보다 얼마나 화재에 잘 대처하는지에 중점을 두고 만들어진 것 같다”며 “그동안 이산화탄소 가스가 유류 화재에 적합하다고 봤지만 여러 각도에서 검토해보겠다”고 말했다.

한편 경찰이 금천구 사고와 관련해 숨진 작업자가 소화설비를 작동해 사고가 난 것으로 보인다고 잠정 결론을 내자, 유족들은 “사망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수사를 진행하는 것 같다. 현장 증거 자료 등을 공개하라”며 반발했다. 합동감식 최종 결과는 다음달 중 나올 전망이다.

구현모 기자 li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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