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연설] 이번 회차에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그 이후 대통령들이 각자의 전임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언급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회차부터 언급되는 전임 대통령은 모두 직선제를 통해 선출됐는데요. 그만큼 현직 대통령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전임 대통령에 대한 언급 내용도 극명히 엇갈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적은 달랐지만 연설에서 동지애가 느껴지는 전현직 대통령이 있는가 하면, 같은 당에서 배출됐지만 전혀 언급하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나빴던 사례도 있고요.
2009년 5월 29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과 부인 김윤옥 여사가 경복궁 앞뜰에서 열린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헌화, 분향한뒤 걸어 나오고 있다 [매경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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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많은 국민의 뇌리에 남아 있고 한국 정치에 너무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건을 상기시키는 연설도 있었습니다. 당시 현직 대통령이 연설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는 대목이 유독 짧았던 것이 인상 깊은데요. 관련 내용은 각 대통령의 연설문을 돌아보며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김대중, 평생 라이벌이자 민주화 동지였던 김영삼 추켜세워
김영삼 전 대통령이 노태우 전 대통령을 언급한 기록이 딱 한 줄 있는데요. 1996년 경향신문 특별회견에서 '두 전직 대통령(전두환·노태우)의 사면을 검토할 의향이 있나'라는 질문에 "재판이 진행 중이므로 사면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적절치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 정도로 언급이 없는 사례는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연설 기록 정도입니다. 취임식 때를 제외하면 아예 언급이 없는데요. 같은 당 소속이면서도 심각한 갈등 양상을 겪었던 두 대통령 사이가 반영된 결과 같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생의 라이벌인 김영삼 전 대통령을 추켜세운 연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결성 기념식을 비롯해 각종 민주화운동 행사에서는 두 사람의 동지 의식이 잘 드러납니다. 특히 민추협은 두 대통령이 군사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합쳐 만든 단체인 만큼 김영삼 전 대통령을 연설문에서 빼놓는 게 더 어려웠으리라 봅니다.
제15대 김대중대통령 취임식전 김영삼 이임대통령과 악수(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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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5월 열린 민추협 15주년 기념식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추협은 1984년 자유와 인권이 억압당하던 암울했던 시절에 김영삼, 김대중이 앞장선 가운데 군사독재 체제에 맞서 민주화의 등불을 밝혀 들었다"며 김영삼 전 대통령 이름을 앞세워 민주화운동의 뜻을 되새겼습니다.
그해 10월에는 부산 민주공원 개원식 연설을 통해 "특히 저는 이 자리를 빌려 1979년 당시 야당 총재로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과감하게 투쟁해 부산과 마산 그리고 전 국민 궐기에 크게 기여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공로에 대해서 여러분과 같이 높이 찬양하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이후 민추협 16·18주년 기념식에서도 김영삼 전 대통령을 언급하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16주년에는 "민추협의 결성은 1984년 당시 군사독재 체제의 폭압 속에서 민주화의 횃불을 높이 든 역사적 사건이었다"며 "김영삼 전 대통령과 제가 공동의장으로 나선 가운데 자유와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국민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민주화의 빛나는 이정표였던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만큼 유능한 대통령을 본 일이 없어"
노무현 전 대통령 연설문에는 임기 내내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이 가득합니다. 노 전 대통령이 대권을 잡는 과정에서부터 동교동계 인사들과 대립하고 임기 중반 열린우리당 창당과 임기 말 분당 사태까지 겪은 것과 꽤나 온도차가 느껴지는 연설문인데요.
2003년 연세대 김대중 도서관 개관식 축사에서는 "우리 국민들은 퇴임한 이후에도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봉사하는 전직 대통령의 모습을 고대해왔다. 그런 점에서 오늘은 국민 여러분께 기쁨과 희망을 드리는 자리다. 각 정당 대표와 각계 지도자 분들이 모두 함께 한마음으로 축복해주고 있다"며 김 전 대통령을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대통령으로 일컬었습니다.
김대중도서관 개관식(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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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6·15 공동선언 4주년 기념 국제토론회 축사를 통해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철학이 있는 대통령이셨다"며 "햇볕정책이야말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미래를 내다보는 원대한 철학적 구상에 기초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꿈이 되었고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 칭송했고요.
이처럼 아예 김 전 대통령이 주인공이 되는 행사에 축사를 한 사례가 무수히 많습니다. 이런 자리에서는 자연히 김 전 대통령을 추켜세우지 않겠냐 하실 수 있을 텐데요. 여타 연설문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2005년 중앙공무원교육원 신임 관리자 과정 강연에서 노 전 대통령은 '권력기관 개혁정책 탓에 국정 장악을 못하고 있지 않나'라는 질문을 받고 대뜸 "나는 김대중 대통령만큼 유능한 대통령을 본 일이 없다"는 말을 내뱉습니다.
이어서 "그분도 인품만으로 나라를 이끌어갔다고 생각지 않는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는데요. 질문자 생각처럼 권력기관 도움 없이 국정을 운영하는 일이 어렵다고 토로하기 위해서였죠. 김 전 대통령을 칭송하려는 목적은 아니었지만 역설적으로 평소 노 전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을 얼마나 존경했는지 가장 잘 드러난 대목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명박 “盧 기리며 애도…슬픔 딛고 떠나간 분의 뜻을 잘 받들어야"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첫 연설 기록은 2009년 6월 1일 '제16차 라디오·인터넷 연설-북핵 포기는 상생과 번영의 출발'입니다. 노 전 대통령 기일로부터 일주일가량 흐른 뒤의 연설문이죠. 그사이 봉하마을과 경복궁 영결식 장소에는 조문객 수백만 명이 줄을 이으며 국가 전체가 침통한 분위기에 빠져들었는데요.
2009년 5월 29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경복궁 흥례문 앞 광장에서 열린 노무현 전대통령의 국민장에서 분향을 하고 있다<매경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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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영결식에도 참석했던 이 전 대통령은 그로부터 3일 뒤 연설에서 이 사건을 짤막하게 언급합니다. 이 전 대통령은 "지난주 우리는 너무나 뜻밖의 슬픈 일을 당했다. 경복궁 앞뜰 영결식장에서 고인의 영정과 슬픔에 젖은 유족들을 마주하면서 제 마음도 너무 아팠다"며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어서 "사랑하는 남편과 아버지, 할아버지를 잃은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아울러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리며 함께 애도해주시고 국민장을 잘 치르도록 협조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면서 "이제 우리 모두 슬픔을 딛고 떠나간 분의 뜻을 잘 받들어 나갔으면 한다"고 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전후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 전 대통령이 장문의 연설을 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죠.
이 전 대통령 임기 말에 이르러 노 전 대통령을 언급하는 연설이 또 등장합니다. 2011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에 관한 국정 연설'인데요. 진보진영에서 버림받으면서까지 한미 FTA를 관철시킨 노 전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는 내용입니다. 이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때 한미 FTA 협상을 주도한 분으로 역사에 분명히 기록되어야 한다"며 "현 정부는 바로 그 나무에 열매를 맺고자 한다. 그 열매는 미래 대한민국과 미국 두 나라 국민이 거두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문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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