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규제·금융제재 등 독자제재 준하는 조처…초반 머뭇대다 미국·EU와 발맞춰
신냉전 심화에 '줄타기 외교' 한계…전문가 "가치·정체성·국익맞춰 현안별 대응해야"
정부 "러시아 전면전 강행 시 수출통제 등 제재 동참 |
(서울=연합뉴스) 이정진 기자 =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맞선 국제사회의 전방위 제재가 본격화하는 가운데 한국도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전략물자와 비전략물자에 대한 수출규제부터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배제를 비롯한 금융제재에도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의 조처에 보조를 맞추고 있다.
일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회원국처럼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등 군사 지원만 하지 않을 뿐 러시아를 압박하기 위한 경제 제재에는 발 벗고 나서고 있다.
한국이 처음부터 적극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사태 초기엔 국제사회의 제재에 동참한다면서도 독자제재에는 선을 그으며 어정쩡한 태도였다가 제재 의지가 부족하다는 대내외 비판이 이어지자 부랴부랴 제재 수위를 높였다.
미국과 중국·러시아 등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양쪽의 눈치를 보는 '줄타기 외교'로 상황을 돌파하려 했지만, 유럽발 신냉전의 분위기가 짙어지면서 이 전략이 더는 먹히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 수출규제에 금융제재까지…초반 머뭇거리다 미국 등과 제재 보폭 맞춰
정부는 지난달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국제사회의 제재에 적극 동참한다'는 메시지만 내놓았을 뿐 구체적인 계획은 밝히지 않았다.
외교부는 '독자제재 배제' 방침을 밝혔고, 기획재정부와 산업부 등 경제부처들은 제재 이행보다는 국제사회의 제재에 따라 우리 경제에 미칠 파장을 줄이는 데 대응의 초점을 맞춘 분위기였다.
물론 러시아와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고 우리 국민·기업을 보호하는 데도 전력을 쏟아야 하지만 상대적으로 제재 의지는 부각되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내놓은 것은 침공 닷새째인 지난 28일. 정부는 전략물자에 대한 수출을 차단하고 미국이 역외통제(FDPR·해외직접제품규칙)를 적용하기로 한 비전략물자 수출을 통제하는 방안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유엔 긴급특별총회에서 발언하는 조현 유엔대사 |
그러나 미국이 FDPR 적용을 면제한 EU(유럽연합) 27개 회원국과 영국, 일본 등 32개국에 한국이 포함되지 못하면서 기업 활동에 대한 피해는 물론 한미동맹에 대한 신뢰에까지 우려가 제기되자 기류가 달라졌다.
정부는 지난 1일 7개 주요 러시아 은행 및 자회사와의 금융거래를 중지하고 러시아 국고채에 대한 투자를 중단했다. 또 전 세계 금융기관이 결제 주문을 주고받는 전산망인 SWIFT 배제를 이행하기로 했다.
일본보다도 제재 대상이 넓고 EU보다도 한발 앞서 금융제재를 발표한 것이다.
다른 한편에선 FDPR 면제를 받기 위한 미국과의 협의도 진행 중이다. 이를 위해선 비전략물자에 대해서도 미국에 준하는 수준의 제재를 취해야 하는데, 정부는 수출기업을 계도하거나 고시를 통해 수출통제 품목 리스트를 정하는 방식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내놓은 수출통제 및 금융제재만 따져봐도 사실상 정부가 애초 배제했던 독자제재 조치에 나선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픽] 한국의 대 러시아 금융제재 세부 조치 |
◇ 짙어지는 신냉전 분위기…'줄타기 외교' 한계 부닥치나
정부가 사태 초반 독자제재 배제 방침을 밝히는 등 대러 제재에 강경한 스탠스를 취하지 않은 것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10위 교역대상국이라는 경제 관계는 차치하고라도 북핵 문제 해결을 비롯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진전을 위해선 반드시 협조해야 할 상대이기 때문이다.
포격 피해 심한 우크라 키이우 지역 민가들 |
외교부 고위당국자가 러시아의 침공 직전인 지난 23일 대러 독자 제재 가능성에 대해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미국이 중국, 러시아 등과 갈등을 빚는 경우 과거 한국은 양측으로부터 모두 쓴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고심하며 '줄타기 외교'를 벌여왔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및 우크라이나 상공에서의 말레이시아항공 여객기 피격 사건 당시에도 미국은 한국에 대러시아 제재 관련 협조를 요청했지만, 한국은 독자 제재 등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2016년 주한미군의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 당시 중국의 강력한 보복 조치를 경험한 것도 한국이 '모호성 유지'에 매달리게 만든 요인으로, 지금의 미중 갈등 국면에서도 이런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미국과 유럽 등 서방과 중국·러시아 간 갈등이 신냉전으로 불릴 만큼 심화하고 고착화할 조짐이 일면서 양쪽 모두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전략도 점점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전략적 모호성으로 한국이 국익을 보호하거나 확대하는 시기는 지났다"면서 "현안별로 우리의 가치와 정체성, 국익에 맞춘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transi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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