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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 (화)

이슈 난민과 국제사회

美 첫 여성 국무장관이 된 난민 소녀, 올브라이트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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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독수리 브로치 단 올브라이트 - 체코 난민 출신으로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에 오른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2016년 7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미국의 상징인 독수리 브로치를 달고 연설하고 있다. 2022.3.24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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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난 유대인 소녀, 마리 야나 코르벨로바는 일찌감치 난민 신세가 됐다. 두 살 무렵 독일 나치의 눈을 피해 영국 런던으로 도망치고 천주교로 개종까지 했지만 불행은 이어졌다. 체코의 스탈린주의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반공산주의 외교관 아버지 요제프 코르벨은 가족을 이끌고 미국으로 탈출했다. 11살의 나이에 미국의 품에 안긴 소녀는 미국식 교육을 받으며 이런 생각을 키웠다. ‘강한 미국이 유럽을 해방시켰다. 미국은 세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국가다.’

● 나치와 공산당 피해 미국으로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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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10월 평양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오른쪽)가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과 건배하고 있다. 2022.3.24 평양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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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차고 똑똑한 소녀는 1997년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이 됐다. 훗날 이름을 개명한 매들린 올브라이트다. 유리천장을 깨고 ‘금녀의 공간’에 들어가 미국 외교정책을 휘어잡은 그는 걸크러시의 원조였다. 악명 높은 독재자들을 적이자 친구로 두었던 올브라이트가 23일(현지시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불과 한 달 전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려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비판하는 칼럼을 뉴욕타임스에 써보낼 정도로 열정을 불태웠지만 지병인 암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 외교계 거두 브레진스키의 제자로 백악관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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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2000년 2월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과 악수하고 있다. 2022.3.24  모스크바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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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웰즐리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부유한 신문 상속인 조셉 메딜 패터슨 올브라이트와 결혼 후 성을 바꾼 그는 워싱턴 조지타운의 사교계에 영향력 있는 리더로 주목받았다. 컬럼비아대학원에서 외교계의 거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밑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땄다. 1976년 지미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된 브레진스키를 따라 백악관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다. 빌 클린턴 행정부 1기 때 유엔 주재 대사를 지냈고, 2기 때 제64대 국무장관에 올랐다. 그의 인준안은 상원에서 99대 0,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 동유럽 나토 가입 추진…서방의 동진 이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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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4월 중국 베이징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으로부터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을 넘겨받고 있다. 2022.3.24 베이징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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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는 말투와 저돌적인 외교 스타일은 올브라이트의 전매특허였다. 1999년 세르비아의 독재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무슬림 인종청소를 저지하기 위해 클린턴을 강하게 압박해 참전을 이끌어냈다. 당시 미국 합참의장인 콜린 파월에게 “쓰지도 않을 거면 당신이 항상 강조하는 이 훌륭한 군대를 뭐하러 갖고 있나”라고 쏘아붙였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체코와 폴란드, 헝가리 등 동유럽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승인한 것은 올브라이트의 주요한 외교적 업적으로 꼽힌다. 오늘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구실이 된 나토의 동진, 즉 서방 동맹의 구소련 진출의 시작점에 그가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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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일(이하 현지시간) 세상을 떠난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인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지난 1997년 3월 12일 당시 퍼스트레이디였으며 나중에 국무장관이 된 힐러리 클린턴이 지켜보는 가운데 국무부 여성 관련 프로그램에 참여해 발언하고 있다.AFP 자료사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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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장관으로 처음 북한 땅 밟아

올브라이트는 북미 관계 해빙기를 이끈 장본인이기도 했다. 2000년 10월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비핵화를 논의했다.

실패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올브라이트는 1994년 르완다 내전 문제 해결을 위해 연합군 개입을 추진했지만 불과 1년 전 소말리아 내전 진압에 실패해 궁지에 몰린 클린턴 정부는 강하게 반대했다. 르완다의 소수 지배층인 투치족과 다수의 후투족 사이에 일어난 부족 갈등으로 1994년부터 2년간 80만명 이상 사망했다. 올브라이트는 훗날 르완다 집단학살을 막지 못한 것을 가장 크게 후회한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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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2000년 10월 23일 평양을 찾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만찬을 갖기에 앞서 인삿말을 하고 있다.로이터 자료사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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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은 포용, 이라크엔 제재…오락가락 외교 비판받기도

이 밖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중재하려 애썼지만 긴장을 완화하는 데 실패했고 대북 포용 정책을 발판으로 한 북한 비핵화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북한에는 포용적이고 이라크에는 제재를 주장하는 등 오락가락했던 올브라이트의 외교 전략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에게 국무장관직을 빼앗긴 오랜 라이벌 리처드 홀브룩 전 유엔 주재 대사가 대표적이다. 비평가들은 올브라이트가 미국이 언제, 어느 지역의 문제에 관여해야 하는지 일관된 비전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고 포린폴리시(FP)는 전했다. 그럼에도 올브라이트는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갈등이 21세기 내내 계속 되리라는 것을 예견했다고 FP는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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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2012년 5월 백악관에서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에게 자유의 메달을 걸어주고 있다. 이 메달은 미국 정부가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장이다.2022.3.24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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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로치에 담긴 외교 메시지

CNN은 올브라이트가 종종 브로치에 외교적 메시지를 담는 것을 즐겼다고 보도했다. 러시아가 미국 국무부를 도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올브라이트는 커다란 벌레 핀을 꼽았고,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자신을 뱀이라고 부르자 보란 듯이 금색 뱀 브로치를 가슴에 달았다. 마녀라고 불렸을 때는 작은 빗자루를, “자립할 수 있는 이민자들만 미국에서 환영받을 것”이라는 이민국 켄 쿠치넬리 국장의 발언에 반발해 자유의 여신상 브로치를 달았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일제히 애도성명을 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그의 손은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손이었다”며 “그녀의 열정적 믿음을 항상 기억할 것”이라고 밝혔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을 향한 열정적인 힘”이라고 치켜세웠고,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도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고 다른 이의 그것을 실현하도록 도왔다”며 애석해했다.

유족으로는 앤, 앨리스, 케이티 등 3명의 딸과, 6명의 손자가 있다.

오달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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