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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이기권 "법원 판결이 양극화 심화, 근로자 격차 더 늘렸다" [김기찬의 인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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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권 전 고용노동부 장관, 퇴임 뒤 첫 언론 인터뷰

중앙일보

이기권 전 고용노동부 장관이 7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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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10여 년 정도면 선진국과 같은 노사관계가 정립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안 됐다. 오히려 매우 부정적인 노사관계는 더 심화하고 있다. 각종 제도와 관련된 갈등도 해소 기미가 안 보이고 증폭되고 있다. 통상임금을 포함해 현안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은 대기업·중소기업 간 격차를 더 키우고 있다. 더 애절하게 노사 당사자와 정치권을 설득했다면, 오늘날 우리 청년들에게 덜 미안할 것인데…라는 반성을 하고 또 한다."

이기권 전 고용노동부 장관은 '더, 더, 더'라는 회한 가득한 심정을 토로하며 중앙일보와 인터뷰에 응했다. 언론과 인터뷰는 2017년 7월 고용부 장관 퇴임 이후 처음이다.

이 전 장관은 2014년 7월부터 만 3년이 넘게 역대 최장 고용부 장관직을 수행한 인물이다. 2015년에는 김대환 당시 노사정위원장(전 노동부 장관)과 함께 9·15 노사정 대타협을 성사시켰다. 비로니크 티머하위스(Weronique Timmerhuis) 네덜란드 노사정위원회(SER) 사무총장은 "매우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노동개혁 합의다. 대단히 놀랍다"며 극찬했다. SER은 1982년 네덜란드의 부흥을 이끈 바세나르 협약을 도출해낸 기관이다. 스페인 경제사회위원회 관계자는 국제노동기구(ILO)에서 "회원국이 모두 공유해야 할 매우 중요한 모범사례"라고 말했다. 9·15 노사정 대타협은 여러 국가가 벤치마킹했다.

박지순 고려대 노동대학원장(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은 그를 이렇게 평했다. "학습과 경험에 기반을 둔 해박한 전문지식에 놀라고, 복잡한 쟁점을 알기 쉽게 정리해 내는 논리력에 감탄하며,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과 입법 전략이 매우 구체적이고 치밀함에 두 손을 들게 된다." 9·15 노사정 대타협을 끌어낸 것도 단순한 뚝심이 아니라 현안마다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전략과 전술이 있었던 덕이다. 노동시장에 혼란이 일 때마다 노·사·정은 물론 정치권까지 그를 주목하고, 그의 지략을 빌리고자 한 이유다. 그러나 이 전 장관은 좀처럼 나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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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 장관이 낸 [노동시장 빅스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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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책을 썼다. 『노동시장 빅스텝』이다. '아들·딸 일자리, 넘어야 할 3개의 산'이란 부제가 붙었다. 노동개혁의 세 가지 방향을 제시했다. 통상임금, 평균임금, 최저임금, 근로시간제도, 일반 해고, 비정규직 등 노동 강행 법규의 불확실성과 경직성 해소가 그 첫 번째다. 노사 간 집단적 교섭을 둘러싼 힘의 불균형 해소가 두 번째다. 마지막으로 디지털 전환 시대에 맞게 근로자와 사업자라는 이분법적 분류의 종언을 포함한 산업현장의 자율을 보장하는 근로계약법제 등 디지털 시대 양질의 일자리 확보 방안을 제안했다.

Q : 그동안 고용노동 현안에 말을 아끼고 칩거하다 책으로 노동개혁의 방향을 제시한 이유가 있는가.

A : "35년간 노동 행정을 한 뒤 국민의 한 사람으로 밖에서 보면서 이제는 객관적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책이 노동개혁을 다루고 있다. 제목을 '빅스텝'이라고 한 까닭은.

A : "한국이 세계 무대에서 처한 사정이나 내부의 갈등 국면을 고려할 때 점진적으로 하나하나 개선하는 것은 시간도 없고, 불가능하다. 전체적으로 고쳐야 할 것을 다 드러내놓고, 여론을 수렴한 뒤 한꺼번에 해야 노동개혁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서다."

Q : 한꺼번에 고치는 게 좋다고 했지만, 지난 정부에서 노동존중이란 이름으로 노동계가 요구하는 것은 거의 다 줬다. 노동계로서는 아쉬울 게 없는 이런 상황에서 개혁에 동참하겠는가.

A : "그래서 현시점에선 역시 국민 여론의 힘이 필요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선진국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비교하고, 심각한 한국의 상황을 소상히 국민에게 먼저 알려야 한다. 특히 지금까지는 임금 근로자만을 대상으로 한 제도 개선을 해왔다. 지난 정부에서 노동계에 준 것도 그 범주에서 이뤄졌다. 앞으로는 일하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개혁이 필요하다. 임금이 아닌 소득의 개념으로 노동개혁에 접근하고 다뤄야 한다. 프리랜서 등 임금 근로자가 아닌 프로젝트형 일자리가 많아지고 있지 않은가. 임금이 아닌 소득 중심의 노동개혁, 즉 일자리 개혁이 필요하다. 그런 측면에서는 고칠 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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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권 전 고용노동부 장관이 7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 2022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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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9·15 노사정 대타협의 합의 사항이 이행만 됐어도 노동시장은 많이 바뀌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9·15 노사정 대타협은 협상 기간만 360일에 달했다. 합의한 항목만 104개 항이다. 내용도 구체적이다. 근로시간을 주 52시간으로 줄이는 대신 탄력근로제 등 유연한 근로시간제를 확대한다. 최저임금은 지역·업종별 개선방안을 마련한다. 임금체계는 직무와 숙련을 기준으로 개편한다 등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적폐의 부산물로 전락하며 노사정 대타협은 없던 일이 됐다.)

A : "탄핵 국면이 펼쳐지면서 일시 멈춤 현상이 나타났다. 현 정부 들어 노사정 대타협의 합의 사항을 다시 꺼내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일시 정지'로 표현하고 싶다. 9·15 정신에 다들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다시 추진할 필요가 있다. 그 방식은 노사정만의 협상이란 낡은 틀이 아니라, 이미 합의한 사안이므로 국민 여론을 챙기며 이젠 드러내놓고 해야 한다."

Q : 현 정부가 노동개혁을 얘기하지만 사실상 임금체계 개편과 근로시간 유연화만 내세우고 있다. 일각에선 '변죽만 울린다'는 비판도 나온다.

A : "지금은 평가할 시점이 아니다. 근로시간과 임금체계 개편 문제는 노동개혁의 예시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앞으로 노동시장을 전체적으로 보고, 큰 그림을 그려 나갈 것으로 본다. 그림이 그려진 뒤 평가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다만 노동개혁의 그림은 전문가의 지혜를 모아서 그려나가는 형식이 좋을 것이다."

Q :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거치면 어차피 노사정이 협상할 테고, 그 과정에서 또 갈등이 빚어지지 않겠는가.

A : "경사노위도 전문가 중심으로 운영체계를 바꿀 필요가 있다. 경사노위는 대통령 자문기구다. 합의 기구가 아니다. 공감대 형성이 목적이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그런 측면에서 경사노위는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갈수록 자기주장만 하는 갈등 기구로 변질되고 있다. 이런 운영 시스템은 임계점에 도달했다고 봐야 한다. 스텝 바이 스텝이 힘들다. 전문가가 전체 그림을 그리도록 하고, 그걸 토대로 당사자의 의견을 듣는 방식이 주효한 시점이다. 여기에 더해서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국민 패널을 꾸리는 것도 방법의 하나다. 전문가가 한국 노동시장의 문제와 그로 인한 미래세대의 먹거리 문제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국민 패널의 의견을 구하는 것이다. 역동적 여론 수렴이 가능하고, 고질병인 정치권의 입김이나 개입도 배제할 수 있다."

Q : 노동개혁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건 뭐라고 생각하나.

A : "현 정부가 먼저 '뭘 고쳐야 하는데?'라고 정부 스스로에게, 전문가에게 물어보라. '무엇'이 나와야 그림을 그릴 게 아닌가. 개혁의 당위성에 대해 자체 점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무턱대고 개혁 안건을 공표하고 밀어붙이는 것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물어보는 과정은 꼭 필요하다."

Q : 대우조선해양 사태는 다단계 하청, 불법 실력행사. 정치권 개입 등 노동시장의 오랜 병폐를 노출한 사건이라고 보인다. 역설적으로 노동개혁의 범위가 넓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 셈인데.

A : "조선업에선 지난 7~8년 동안 구조조정이 진행됐다. 많은 사람이 떠났다. 얼마 전부터 수주가 잘 되면서 일자리가 늘고 있다. 하지만 수주 단가가 낮아서 원가를 못 맞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앞으로 2년 뒤쯤부터 수주하는 물량은 단가가 오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임금인상 여력이 생긴다. 당장은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버겁겠지만, 여력이 생기면 하도급 임금인상 등 차별을 해소해 나가야 한다. 그 계획을 지금부터 짜야 한다. 그러려면 원청 노사의 양보가 아주 중요하다. 대우조선해양 사태를 보면서 뉴욕 피오렐로 라과디아 판사의 명판결이 떠올랐다. 빵을 훔친 피고에 대해 처벌을 고집하는 주인, 벌금 10달러를 선고한 판사, 그러고는 10달러씩 거둬서 피고에게 준 판사와 방청객들. 빵을 훔치면 처벌받아야 하지만, 훔치지 않도록 같이 가는 모습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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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권 전 고용노동부 장관이 7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 2022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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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판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최근 법원의 판결이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격차를 더 심화하고 있다고 책에서 지적했는데.

A : "기본적으로 사법부가 근로자와 사용자라는 두 개의 개념으로만 본다. 공장 근로 시대의 이런 이분법적 분류는 4차 산업혁명 등 노동시장의 급변으로 종언을 고하고 있다. 그런데도 사법부는 둘로 나눈 뒤 근로자에 더 비중을 두는 경향을 보인다. 근로자를 배려하는 점은 이해가 가지만 아쉬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두 당사자만 판결에 있지, 경제와 사회가 없어서다. 예컨대 통상임금이나 임금피크제 판결을 보자.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하면서 근로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시장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볼 필요가 있다. 통상임금으로 책정하는 연장근로, 야간근로, 휴일근로 수당 등이 상여금이 들어가면서 확 올랐다. 한데 상여금을 받는 사람은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속한 25%의 근로자뿐이다. 나머지 근로자에겐 혜택이 없다. 이 판결이 결과적으로 근로자 간 격차를 더 벌렸다. 이런 점을 감안했다면 혼란도 줄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Q : 법 또한 사회를 지탱하기 위한 것일 텐데, 법과 조율될 수 있는 개선 방법이 있을까.

A : "법으로 정해진 것이 있지만, 그 이외에 나머지는 당사자와의 약속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사법적 판단이 이뤄지면 좋지 않을까 한다. 노사 합의로 기본급을 조정했는데, 한참 뒤에 "넣어라, 빼라"하는 통에 자율은 온데간데없어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원청이 직업 능력 등의 향상을 위해 하청업체를 지원하는 것을 지휘 내지 개입으로 본다. 합법 도급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자율성을 존중하고, 자율을 배려하는 것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노동시장이 활력을 얻는다."

Q : 자율성이 노동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을 어느 정도로 보는가.

A : "노동개혁의 첫 번째 빅스텝은 법 문구에 집착하거나 얽매인 경직성 해소여야 한다. 소득 3만 달러가 넘는 국가는 15~64세 고용률이 74%를 넘는다. 한국은 65% 전후다. 여기에 선진국은 연금으로 생활이 가능한데, 한국은 국민연금으로 살기에 버겁다. 선진국과 달리 65세 이후에도 일자리가 필요하다. 이를 고려하면 한국 고용률은 74%+α가 돼야 한다. 그런데 한국은 소득 3만 달러가 넘는데 왜 고용률이 정체돼 있을까. 다른 나라와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바로 자율성이 얼마나 존중되고 있느냐에 따라 갈린다. 노동분배율이 높은 국가는 고용률이 높다. 일하는 사람이 많아야 분배도 잘 된다는 것이다. 이런 국가는 자율성이 상당히 높다. 법에 의해, 재판에 의해 규율되면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에다 자신감마저 없어져 사람을 안 쓴다. 고용률은 자율에 기반을 둔 유연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Q : 전투적 노사관계를 희석하기 위해서는 힘의 균형이 필요하다고들 한다.

A : "맞는 말이다. 균형점을 찾아가는 작업을 해야 한다. 국제노동기구(ILO)의 결사의 자유 협약을 비준했다. 파업이 자유로워졌다. 무턱대고 공장을 멈추는 사태를 방지하려면 인사경영권의 본질에 관한 사항을 보호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파업 때 대체인력을 어느 수준에서 투입할 수 있는지 등을 검토할 때다. 부당노동행위도 경영계만 처벌하는 것은 글로벌 스탠다드에 안 맞다. 부당노동행위 이전으로 원상회복토록 하는 쪽으로 개선하는 게 바람직하다. 노사관계의 균형을 잡는 것은 격차 해소의 지름길이기도 하다."

Q : 최저임금을 둘러싼 논란도 끊이지 않고 있다.

A : "우리나라 최저임금 영향률은 선진국의 8배가 넘는다. 최저임금이 이처럼 일자리에 미치는 영향이 큰 것은 문제가 있다. 보다 못한 국회가 2019년 상여금을 최저임금에 산입토록 했지만, 노조가 취업규칙 변경에 동의하지 않아 산업현장에선 반영이 안 되고 있다. 그 결과 또다시 격차만 확대하는 요인이 됐다. 주휴수당도 마찬가지다. 선진국에는 없는 주휴수당 때문에 쪼개기 아르바이트가 양산한다. 청년들은 한 곳에서만 아르바이트를 하면 됐는데, 주휴수당 때문에 두 세 군데를 뛰어야 한다. 이참에 주 40시간 임금의 16.7%를 차지하는 주휴수당을 일정 기간을 갖고 기본급화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영향률이 낮아지고, 최저임금 인상 여력도 확보하게 된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년과 저소득층이 혜택을 본다."

☞이기권 전 고용노동부 장관은 ▶광주고, 중앙대 행정학 박사 ▶1981년 행정고시 25회▶광주고용노동청장▶근로기준국장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고용부 차관 ▶한국기술교육대 총장 ▶고용부 장관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wol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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