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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깨물고 목 조르지만, ‘반죽떼기’ ‘8자 쓰기’ 달인…자폐 직장인의 하루 [세상으로 출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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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성 장애인 보호작업장 ‘래그랜느’의 하루

10년을 함께 일해도 소통없는 저마다의 세상

반죽 떼고 포장하는 단순 작업도 6개월 배워야

깨물고 목조르고... 돌발 위험 속 불안한 근무

#에그스토리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속 우영우를 바라보는 자폐 장애인 가족들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습니다. 법전을 몽땅 외워 서울 법대를 졸업하고, 대형 로펌에서 변호사 업무를 척척 해내는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렵기 때문이죠. 겨우 구한 직장에서 하는 일은 조립, 포장 같은 단순 작업 뿐, 월급도 최저임금의 절반도 안되는 20만~40만원 정도입니다. 그저 집밖에 몇시간 떼어놓는 데 만족합니다. 혹시 사고나 치지 않을까 불안해 하면서 말이죠. 조선일보가 현실 속 우영우들이 일하는 직업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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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전 서울 강남구 래그랜느보호작업장. 최고 경력의 남범선씨가 반죽을 떼어내 쿠키 성형작업을 하고 있다. 범선씨는 0.1g도 틀리지 않게 반죽을 떼어내 '반죽떼기 달인'으로 불린다.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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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 일원동의 자폐성 장애인 보호작업장 ‘래그랜느(Les graines)’의 출근시간은 9시 30분이다. 하지만 다들 1시간 넘게 빨리 온다. 가끔은 컴컴한 새벽에 와서 잠긴 문 앞에서 기다리는 직원도 있다. 보통 회사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오전 7시 43분, 이날 1등은 남범선(40) 대리다. 아버지이면서 회사 대표인 남기철(69)씨와 함께 왔다. 범선씨는 오자마자 출근부에 이름 석자부터 썼다. 뒤이어 반바지, 반팔티셔츠 차림의 임기영(가명·36)씨가 경쾌하게 들어섰다. 혼자 성남에서 1시간 가량 버스타고 오는 길이다. 기영씨는 기자와 눈이 마주치자 놀란 듯 멈춰서서 제자리를 뱅글뱅글 돈다. 남 대표가 “휴가 잘 보냈어?” 하고 물으니 “잘 보냈어? 네. 네” 하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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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그랜느의 화가 김석우씨가 8일 오전 외근현황판에 날짜를 적고 있다. /최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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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그리기를 좋아하는 김석우(가명·26)씨가 출근해서 맨 먼저 하는 일이 외근현황판에 오늘의 날짜를 적는 일이다. 이날 ‘8′자 두개를 쓰는데 3분이 넘게 걸렸다. 석우씨가 정성스레 쓴 숫자 8은 찍어놓은 듯 동그랗다. 그의 그림은 회사 곳곳에 걸려 있다.

1주일간 여름휴가를 마치고 첫 출근한 지난 8일, 래그랜느는 여느 때처럼 1시간 빨리 하루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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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전 서울 강남구 래그랜느보호작업장에서 자폐성 장애인들이 파티셰(맨 왼쪽)의 지시에 따라 제과제빵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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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애 같은 어른들, 그들의 직장 ‘래그랜느’

래그랜느는 불어로 ‘밀알’이라는 뜻이다. 사단법인 ‘밀알천사’가 학교 졸업 후 갈 곳 없는 자폐 장애인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2010년 설립했다. 자폐 장애인 13명에 지적장애인 1명 등 발달장애인 14명(직원 10명, 훈련생 4명)이 일한다. 20대 초반에서 40대까지 모두 성인이다. 빵과 쿠키를 주로 만들고 가끔은 볼펜과 상자조립 등 임가공도 한다. 엄연한 직장이지만 보호시설의 역할이 크다. 직업훈련은 주로 파티셰 2명이 맡고, 원장과 교사 2명은 보호 관리를 한다. 직원들 임금은 월 평균 40여만원밖에 못주지만, 회사는 매년 적자다. 늘 손익분기점을 맞추는 게 이 회사의 목표다. 밀알천사의 남 대표는 “집 말고는 갈데가 없는 아이들에게는 직장을, 부모들에게는 단 몇시간이라도 휴식을 주기 위해 만든 곳이 래그랜느”라고 말했다.

오전 9시30분 작업 시작 전까지 모두 모여 앉아 기다린다. 서로 말도 없고,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각자 성경책을 꺼내 노트에 베껴 적는다. 전날 쓴 곳을 찾아 이어쓰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무슨 글씨인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흘려쓰는 사람도, 인쇄한 듯 또박또박 쓰는 사람도 있다.

막내 재혁(가명·24)씨가 갑자기 일어서 사무실 안을 왔다갔다 했다. 표정은 싱글벙글이다. 탈의실 쪽에선 ‘따닥 따닥’ 하는 소리가 났다. 성준(가명·24)씨가 전기파리채로 날벌레를 잡는 소리다. 박신정 교사는 “서너마디도 대화를 잇기 어려운 친구들이다. 다들 자기만의 모습으로 지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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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전 서울 강남구 래그랜느보호작업장에서 자폐 장애인들이 쿠키 성형작업을 하고 있다. 3~6개월간 반복 훈련을 거쳐야 성형, 포장 등 단순 작업이라도 가능한 게 자폐 장애인들의 현실이다.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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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g도 안틀리는 반죽 떼기의 달인

“9시 반! 들어가야 합니다.” 기영씨가 소리쳤다. 그러자 한명씩 탈의실에서 하얀 방진복에 모자를 쓰고 나와 제과제빵 작업장으로 향했다. 파티셰 지시에 따라 반죽 떼어내기, 모양만들기, 포장하기에 투입됐다. 반죽과 오븐 작업은 파티셰가 직접 한다. 이들이 하기엔 어렵기도하고, 위험하기 때문이다. 정일영 래그랜느 원장은 “1부터 10까지 숫자는 셀 줄은 알지만, 쿠키를 열개씩 나눠서 비닐에 담으라고 하면 못하는 친구들이 많다”며 “단순 작업이라도 가능하려면 적어도 3~6개월 정도의 반복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범선씨의 0.1g도 틀리지 않게 반죽 떼어내기, 석우씨의 사진처럼 샘플과 똑같은 쿠기를 만들기는 신기에 가깝다.

하루종일 웃는 모습의 송경수(가명·24)씨는 제과제빵 작업에서 제외다. 직원들 중 가장 의사소통이 어렵다. 그만큼 중증이다. 볼펜조립, 박스조립 등을 시키지만 사실 그것도 10개 중 3~4개가 불량이다. 최근엔 퇴근 길에 한 원룸 도어락 소리에 꽂혀 계속 눌러보다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마침 미혼 여성 혼자사는 집이어서 스토커로 의심받은 것이다. 부모와 교사들이 사정 사정해서 겨우 용서를 받았다. 그런데도 경수씨는 “경찰차 또 타고 싶어” 하며 해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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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전 서울 강남구 래그랜느보호작업장에서 자폐성 장애인들이 제과제빵 작업을 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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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물리고 목졸리고... 한시도 눈 뗄 수 없어”

11시 30분, 오전 작업 2시간이 끝났다. 12시부터는 점심시간이다. 평소엔 인근 경찰서 구내식당을 이용하지만, 이날은 휴가중이던 지난 4일이 범선씨 생일이어서 남 대표가 짜장면과 탕수육을 쐈다. 밥 먹는 모습도 각양각색이다. 석우씨는 볶음밥을 납작하게 펴서 밥알을 한알씩 떼어 내서 먹는다. 재혁씨는 옆사람 그릇에 있는 탕수육을 손으로 집어 먹다가 혼이 났다. 김민재 교사는 “각자 그릇에 먹을 만큼 나눠서 담아주지 않으면 서로 먹겠다고 싸우기도 하고, 배가 부른지를 몰라서 마구 집어먹다가 구토를 하거나 배탈이 나기도 한다”면서 “가끔은 대변을 가리지 못해 실수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문제는 돌발상황이다. 범선씨는 양쪽 엄지손가락에 굳은 살이 붙어 굵기가 보통 사람의 2~3배는 돼 보였다. 화가 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피가 나도록 손가락을 깨문다고 한다. 남 대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 있으면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나마 직장에 나오면 자해 정도나 횟수가 훨씬 줄어든다”면서 “도로에 뛰어들어 차에 치일뻔한 일도 한두번이 아니다”라고 했다. 갑자기 돌변해 폭력성을 보이는 직원들도 있다. 때문에 상당수 직원들이 신경안정제나 항우울제 같은 약을 달고 산다. 박 교사는 “팔이 물린 적도, 목이 졸린 적도 있다”면서 “어느 타이밍에서, 어떤 상황에서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게 때문에 늘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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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경기 포천시 래그랜느 농사체험장에서 자폐성 장애인들이 잡초를 뽑고 있다. /래그랜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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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없어도 자립할 수 있는 터전 있어야”

오후 4시30분, 하루 작업이 끝났다. 모두들 방진복을 벗고 퇴근 준비를 한다. 누가 뭘 하라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들 청소를 시작했다. 벌레 잡기를 좋아하는 성준씨는 세제를 들고 화장실 구석구석을 닦았고, 기영씨는 흩어져 있는 쓰레기를 모아 담았다. 책상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거나 이쪽 저쪽 눈치보며 청소를 안하려고 꾀부리는 사람도 있었다. 열심히 하든, 혼자 딴짓을 하든 서로에게 관심은 없었다. 교사들은 “이게 자폐성 장애”라고 말했다.

래그랜느는 한달에 두번씩 경기도 포천에서 농사체험으로 근무를 대신한다. 밭에선 감자와 옥수수, 토마토를 키우고, 과수원에선 아로니아와 오디를 기른다. 농약 없이 키우는 것들이다. 남 대표가 2011년 아들 범선씨의 월급을 모아 사놓은 땅이 기반이 됐다. 2018년엔 직원들과 교사들이 쉴 수 있는 체험관도 지었다. 수확한 농산물로 식초나 과일청도 만든다. 남기철 대표는 “아이들이 평생 일할 수 있고, 자립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땅을 마련했다”면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함께 어울려 살면 부모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이자 바람”이라고 했다.

[최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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