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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목)

이슈 미술의 세계

'넌 하인이야' 소리 들은 이민자…'제2의 파친코' 들고 한국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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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작가. 사진 다산북스, Nola Lo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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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영혼을 형성하는 건 한국어에요. 그 가치관을 심어준 언어로 이 책이 다시 태어나는 걸 보니 예술가로서 가장 뿌듯하고 행복한 순간입니다"

지난해 12월 미국에서 출간한 첫 장편소설 『작은땅의 야수들』(하퍼 콜린스)을 28일 한국어판으로 번역해 펴낸 한국계 미국인 작가 김주혜(35)를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그는 "한국어는 따스하고 촉감이 강한 언어라서, 번역본에는 의성어, 의태어 등 감칠맛 나는 표현이 많아졌다"며 "'아니 이게 얼마나 오랜만이야, 제수씨는 어떻고?' 등의 대사는 한국말로 표현했을 때 본래의 따뜻한 맛이 나더라"고 말하며 웃었다.



한국 사람, 역사, 한반도 다룬 영어 소설… '제 2의 파친코' 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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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땅의 야수들' 미국판 표지와 한국판 표지. 하퍼 콜린스, 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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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땅의 야수들』은 1917년 평안도부터 1964년 제주도까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부터 근현대사 초입의 한반도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역사를 다루지만 이야기는 개인의 서사가 얽히며 흘러간다. 한국의 역사적 격동을 배경으로 개인을 클로즈업한 영어 소설이라는 점에서 '제 2의 파친코', 보통 사람의 삶과 심경을 현실적으로 그려낸 문체에서 '톨스토이가 연상된다' 등 미국 내에서 호평을 받으며 아마존 '이달의 책'에 올랐고, 지금까지 더 타임스를 비롯해 미국 40여 개 매체에 추천 도서로 소개됐다.

김주혜는 "파친코는 가족을 위한 생존을, 작은 땅의 야수들은 나라를 위한 투쟁의 소설이라 각각의 독창성을 지닌 작품이지만 '제 2의 이민진'이란 평은 너무 영광스럽다"며 "러시아에는 '영혼의 멜랑꼴리·쓰라림'을 일컫는 '토스카'라는 단어가 있는데, 한국의 '한'과 비슷한 느낌이 있는 정서라 그렇게 평가해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구 선생 도장 찍힌 문서 태우며 울던, 갈색 눈의 잘생긴 외할아버지 이야기가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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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작가. 사진 다산북스, Nola Lo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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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주제 중 독립운동 시기를 포함한 한국의 역사를 다루게 된 건 작가가 어릴 때부터 들었던, 김구 선생을 도와 독립운동을 했다는 외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뇌리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김주혜는 "외할아버지는 열살 때 학교를 그만뒀지만, 신문을 챙겨 읽고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을 가장 좋아할 정도로 박식한 분이라 들었다"며 "갈색 눈동자의 잘생긴 얼굴, 당시로는 드물게 운전면허도 있고 테니스도 치던 분"이라고 설명했다.

7남매 중 막내였던 어머니가 대학생일 때 돌아가셔서 작가는 직접 본 적은 없고, 어머니도 어린 시절 기억이 흐려서 이모와 삼촌들이 전해준 말이 더 많다. 김주혜는 "이모는 외할아버지가 울면서 김구 선생의 도장이 찍힌 문서와 자신의 운전면허증을 태우는 장면을 어릴 때 봤다고 하더라"며 "이 책을 쓰며 자료를 찾던 중, '상하이 독립투사들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테니스를 많이 쳤다'는 대목을 읽고 '아, 할아버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는 "작가의 가족들은 가족 이야기를 쓰는 걸 달가워하는 사람이 대체로 없다. 그래서 어머니도 '왜 이걸 책으로 썼냐' 할까 봐 걱정했는데, 걱정과 다르게 '이게 한국의 역사다, 네가 잘 그려내서 너무 자랑스럽다'고 말해주셨다"고 덧붙였다.



여성, 기생 등 개인 초점… 해외 독자 위해 역사적 사실은 단순하게



『작은땅의 야수들』에는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이상주의자인데다 나라를 위해 모든 걸 바치는 주인공이 있는 반면, 조금 더 개인적인 삶을 꾸리는 데 집중하는 인물도 있다. 일본인 캐릭터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여성, 직업 기생이 이야기의 큰 축으로 등장하는 점도 색다르다. 여성이 직업을 선택할 여지가 없던 시절, 드물게 경제적 독립을 하고 활동을 자유롭게 하던 직군이라 골랐다고 했다. 작가는 "'마농 레스코' 등 서양 문학이나 '라 트라비아타' 같은 오페라에서는 (기생과 비슷한 역할의 여성들이) 낭만적인 존재로 그려지는데, 기생도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당당하고 애국심이 강했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미국 독자를 염두에 두고 영어로 쓰면서, 자세한 역사적 사실은 단순화하고 약간의 문학적 각색을 한 점도 소설의 문턱을 낮춘 요인이다. 작가는 "여러 계열의 공산당이 있었지만 1개만 있는 것처럼 표현하고,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있는 장면을 그리고 싶어서 실제로는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없는 시기를 그리면서도 상하이를 배경으로 했다"며 "역사서가 아니라 소설이기 때문에 가능한 약간의 소설화"라고 말했다.



여성이라, 황인종이라 차별하던 첫 직장… 박차고 나온지 10년만에 장편 대박



인터뷰도 한국어로 진행한 작가는 "미국에서의 호평도 좋지만 한국 독자들에게 더 격려받고 인정받고 싶었다"며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김 작가는 1987년 인천에서 태어나 1997년 미국으로 이주했고,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한 뒤 미국의 한 출판사에서 2012년까지 근무했다. 2016년 영국 문학잡지 '그란타'에 단편소설 '보디 랭귀지'를 발표하며 데뷔한 이후 이번이 첫 장편소설이다.

어릴 때 작가를 꿈꾼 것도 아니고 관련 전공도 아니지만, 긴 시간 이민자로 힘겹게 사는 동안 '한국'을 곱씹어 생각하며 정체성이 더 짙어진 게 이 소설을 쓴 배경이 되기도 했다. 작가는 "출판사에 일하는 동안 '너는 하인이야'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황인종이고, 여성이라 차별당한 순간이 많았다"며 "'너 같은 건 글 쓸 생각 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내 자아가 자랑스럽다, 나는 한국인이다' 되새긴 게 저를 여기까지 오도록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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