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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2 (화)

[매경춘추] 악역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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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드라마에서인가 흰머리에 두꺼운 안경을 낀 학과장이라는 교수가 강의를 미끼로 시간강사를 성추행하려 하는 장면이 나왔다. 또 다른 극에서는 학과장이 대학원생과 바람이 나 가정을 버렸다. 현실에서의 학과장은 교수들이 서로 안 맡으려 하는 고난의 자리다. 학생들의 민원과 대학 행정의 어마어마한 서류 처리, 게다가 의무적으로 채워야 할 연구업적으로 하루하루를 허덕여야 한다. 추문에 말려들까 학생과의 면담은 정해진 시간에 반쯤 열어 놓은 연구실에서 진행하고, 인기 강사를 구하려 백방으로 뛰어다닌다. 성추행하고 바람피울 정도로 한가한 학과장은 보지 못했다.

사립학교 이사장은 거의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악마로 묘사된다. 시청률 1위에 올랐던 한 인기 드라마에서 사립고등학교 이사장은 성적조작, 입시비리, 횡령, 투기, 살인교사, 미필적 고의에 의한 존속살해, 불법투약, 납치, 유기 심지어 직접 살인까지 하는 범죄 달인으로 그려졌다. 내가 아는 현실의 이사장은 학교 근처 국민평형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주말에 친구들과 남산 한 바퀴 돌고 저녁에 냉면에 소주 한잔 마시고는 마을버스 타고 귀가하는 사람이다.

오늘도 신문 지면에는 많은 재산을 조금이라도 더 불리기 위해 갖가지 편법을 자행하는 재벌가부터 조폭과 밀착되었다는 의혹을 받는 단체장, 단순 거짓말과 심각한 범죄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정치인, 직위가 해제되어도 버젓이 급여를 챙기는 교수까지 한숨 나오게 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런 부조리를 속 시원히 해결하지 못하니 가공의 이야기에서 대리만족을 얻는 것이 아니겠나.

그러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악역에 대해서는 유감이다. 음모와 모략으로 타인의 인생을 짓밟고 부귀를 지키기 위해 공고한 카르텔의 장막에서 권세를 휘두르는 역할이 대부분이다. 드라마 속의 대통령은 나라를 팔아먹고, 단체장은 지역을 말아먹고, 의원은 불법으로 자금을 받아먹는다. 의사는 환자를 속이고, 기자는 보도를 왜곡하고, 검사는 죄 없는 사람을 가해자로 둔갑시킨다. 온통 '우리 대 그들' '선과 악'이라는 단순한 양자 구도로 만들어 정의를 내세우는 주인공의 상대역으로 등장하게 한다.

과연 세상이 그렇게만 단순하다면 오히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가 쉽게 풀릴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오묘한 존재와 삶이라는 두툼한 시간은 그렇게 단선적이지 않다. 이미 지난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친 우리 역사에서의 등장인물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동기와 결과가 옳고 그른지를 허술한 잣대로만 재기에는 인간과 상황이 훨씬 다채롭기 때문이다.

한류열풍에 우리 드라마와 영화의 영향이 전 세계적으로 커지는데, 단편적인 인물보다는 고뇌와 운명에 휘둘리는 복잡한 인간상이 좀 더 많이 보였으면 한다. 오늘도 드라마에서는 악덕 공무원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조차도 현실에서는 재활용쓰레기 봉투를 들고 귀가가 늦어지는 딸을 기다리며 집 앞을 어슬렁대고 있을 것이다.

[장지호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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