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스가 요시히데 전 일본 총리가 도쿄의 니혼부도칸(日本武道館)에서 열린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국장(國葬)에 참석하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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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도쿄의 구단시타에는 일반인을 위한 헌화대가 마련됐다. 검정 정장을 입은 20대 남성부터 기모노를 차려 입은 70대 할머니까지 손에는 흰 국화를 들고 4㎞가 넘는 긴 행렬을 늘어섰다. 잡담 소리도 들리지 않는 행렬이었다. 행렬이 지나는 한 공원에 자동 분무기가 안개 같은 물을 뿜어내고 있었고 지나는 사람들은 피하기보단 일부러 헌화할 국화를 분무기에 가까이 댔다. 이날 2만3000여 명이 헌화했다.
안중근 의사의 총격에 사망한 ‘이토 히로부미’가 돌연 등장한 건, 스가 전 총리의 추모사 말미였다. 스가 전 총리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친구 이토 히로부미를 보내고 읊은 노래만큼, 내 마음을 제대로 읊은 한 수(首)는 없다”며 ‘마음을 끝까지 주고받은 사람이 먼저 떠났다. 이제 이 세상(일본)은 어디로 가야 하나’를 읊었다. 장례식장에서 이례적인 박수가 터졌다. 일본제국 육군의 창설자인 야마가타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지휘한 인물로,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일본인을 울린 2367자(字) 추도사와 2만3000여 국화는 아베를 잃은 일본 보수·강경파가 앞으로 나갈 길을 엿보여준 장면이지 않을까.
최근 한두 달 새 도쿄를 방문한 한국 정치인과 관료들은 다들 “일본은 문재인 전 정권과 다른 윤석열 정부에 호의적” “K팝을 좋아하는 일본 젊은이들을 보면 아무 걱정이 없다”고 말했다. 극소수의 혐한 세력만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 정치인은 한국이 아닌 일본 국민을 책임지는 사람들이다. 한일 관계는 한국이 일본과 마주 서서, 각자 이득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해관계를 밀고 당기는 일이다. 일본의 선의로 얻는 선물 같은 게 아니다.
아베 전 총리의 입버릇은 ‘세계의 중심에서 일본을 꽃피우자’였다. ‘전쟁하는 정상국가론’이라는 아베의 신념은 상당수 일본 국민의 지지 속에 스가 전 총리 등 정치인에게 이어질 것이다.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지만 그들의 장례식은 1909년과 1922년 일본 국민의 추모 속에 국장으로 치러졌다. 일본 국민에게 그들 또한 일본을 위한 정치인이었을 따름이다.
[성호철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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