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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미군 위안부’ 40년 늪…“이제라도 국가폭력 인정 다행”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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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촌 미군 ‘위안부’ 피해자들, 일부 승소 확정

“끝이 아니라 시작…정부, 국회 책임져라”


한겨레

기지촌 미군 ‘위안부’ 피해자 김숙자(72·왼쪽에서 두번째)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일부 승소 판결을 받은 29일 소송 대리인을 맡은 변호사 및 활동가 등과 사진을 찍고 있다. 이우연 기자 az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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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소송을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대법원 판결이 나지 않아 답답했는데 오늘 우리 할머니들 손 든 판결을 내주셔서 눈물이 납니다. 소송이 진행되는 몇 년 동안 해마다 언니들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하늘에 있는 언니들도 기뻐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29일 오전 10시30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문 앞에 선 기지촌 미군 ‘위안부’ 피해자 김숙자(72)씨는 이 말을 한 뒤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오늘은 기분이 너무 좋아 소리를 빽빽 지르고 싶다”며 기자회견 내내 웃음 짓던 그였다. 김씨의 울먹임에 조금 전까지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치던 활동가들도 이내 숙연해졌다.

대법원은 이날 김씨를 포함해 한국 주둔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에 종사한 ‘위안부’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들에게 각 300만~700만원씩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기지촌 위안소를 운영한 것이 정부 주도의 국가폭력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기지촌이 조성된 때로부터 65년,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기지촌인권여성연대가 발족한 지 10년, 손해배상청구소송이 제기된 지 8년3개월 만이다. 2014년 122명이던 원고는 그사이에 24명이 세상을 떠나고 일부가 소를 취하하면서 95명으로 줄었다.

김숙자씨는 대법원의 판결 후 “너무 좋아 소름이 돋는다”고 말하며 소매를 걷어 팔뚝을 쓸어내렸다.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김씨는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구박을 받다 12살 서울에서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19살이 된 그는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지촌에 발을 들였고 충남 성환, 진천, 태안, 경기 평택까지 기지촌을 전전했다. 59살이 된 2009년에서야 그는 기지촌을 떠나게 됐다.

김씨의 동료 여성들은 국가가 만들고 관리한 기지촌의 성매매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매주 보건소에서 성병 검사를 받아야 했고, 검사 결과가 양성이면 낙검자 수용소에 수용됐다. 낙검자 수용소의 다른 이름은 ‘몽키 하우스’. 페니실린 주사를 맞은 뒤 고통 때문에 수용소 철장에 매달려 소리를 지르는 여성들의 모습이 꼭 동물원 원숭이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 김씨는 친구가 페니실린 주사를 맞고 쇼크로 숨져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우리를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는 거야. 우리가 자신을 스스로 방어해야 했어.” 김씨가 말했다.

한겨레

김숙자(72)씨가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열린 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손해배상 청구소송 대법원 판결 선고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마친 뒤 눈물을 훔치고 있다. 이날 대법원은 “정부가 원고들에게 각 300만~700만원씩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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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원고에 대한 국가 책임을 인정한 2018년 항소심 선고 직후 양쪽이 상고했으나 대법원 판결은 4년 넘게 나오지 않았다. 우순덕 햇살사회복지회 대표는 “누군가는 대법원 판결이 법률심이라 증거 자료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원고들은 다시 탄원서를 작성하고 피맺힌 육성이 담긴 녹음을 판사에게 제출했다”며 “원고들의 간절한 염원이 이 자리를 만들었다”고 했다.

원고들에게 여전히 아쉬운 점은 있다. 원고 쪽은 강제격리 여부에 따라 피해자별로 배상액이 다른 점, 재판부가 국가가 적극적으로 기지촌을 운영하고 성매매를 조장했다고 인정하면서도 국가의 보호의무 위반은 인정하지 않은 점, 공무원들이 성매매알선업자들과 유착관계에 있는 등 불법행위를 했다는 주장이 인정되지 않은 점 등을 지적했다. 1990년대 경기 의정부에서 기지촌 보건소 의사로 일했던 문정주 전 서울대 의대 교수는 “공무원과 경찰들은 여성들에게 자행되는 폭력과 착취, 고통은 단속하지 않고 성매매를 강요하는 업소의 불법에 눈감거나 협조하기까지 했다”고 지적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성명서에서 “오늘 대법원 판결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며 정부의 공식 사과와 국회에 발의된 ‘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 및 피해자 지원에 관한 법률안’ 통과, 경기도의회에서 통과된 ‘경기도 기지촌여성 지원 등에 관한 조례’에 따른 피해자 지원을 촉구했다.

이우연 기자 az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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