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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수)

이슈 [연재] 연합뉴스 '특파원 시선'

[특파원 시선] 코소보-세르비아 갈등서 드러난 EU의 무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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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쿠르티 코소보 총리(왼쪽)와 보렐 EU 외교·안보 정책 고위대표
[EPA=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로마=연합뉴스) 신창용 특파원 = 유럽 남부 발칸반도의 작은 국가 코소보 북부에서 작동하던 시한폭탄 타이머를 잠시 멈춘 건 유럽연합(EU)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알빈 쿠르티 코소보 총리는 22일(현지시간) 불법 차량 번호판에 대한 과태료 부과를 이틀간 유예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쿠르티 총리는 "제프리 호베니어 코소보 주재 미국 대사의 헌신과 참여에 감사하다"며 "과태료 부과를 48시간 유예해달라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EU의 줄기찬 설득에도 끄떡하지 않았던 코소보 정부가 미국 정부의 요청에는 한발 물러선 셈이다.

코소보 정부는 11월 1일부터 세르비아 정부가 발급한 번호판을 부착한 차량에 경고장 발행을 시작했다.

세르비아 정부가 발급한 차량 번호판을 코소보 정부가 발급한 차량 번호판으로 교체하는 작업이 개시된 것이다.

코소보 북부에 살지만, 자신은 세르비아인이라고 여기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이에 강력히 반발했다.

정부, 사법부, 경찰 등 코소보 북부의 모든 기관에서 줄 사임이 이어졌다.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번호판을 교체한 차량에 불을 질렀다.

외부인의 시각에서 보면 겨우 차량 번호판 문제라고 치부하기 쉽지만 '피의 역사'를 간직한 코소보와 세르비아에는 결코 간단한 사안이 아니다.

코소보는 자국의 세르비아계 주민이 코소보 국민으로서 정체성을 갖길 원하고, 반대로 세르비아계 주민은 자신이 사는 곳이 여전히 세르비아 땅이라고 믿는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유럽의 화약고인 발칸반도가 다시 긴장에 휩싸이자 유럽연합(EU)이 개입했다.

EU 외교 수장인 호세프 보렐 EU 외교·안보 정책 고위대표가 직접 나서 코소보, 세르비아 양국 정상을 설득했지만,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코소보가 번호판을 교체하지 않은 차량 운전자에게 과태료를 부과하겠다고 밝힌 날짜는 22일이었다.

보렐 고위대표는 하루 전날인 21일 코소보, 세르비아 양국 정상을 벨기에 브뤼셀로 불러 8시간 동안 마주 앉아 절충안을 모색했지만, 결과는 합의 결렬이었다.

보렐 고위대표는 회동을 마친 뒤 "오늘 논의 실패와 수일 내에 벌어질 수 있는 그 어떤 긴장 고조나 폭력 상황은 양측 모두에게 중요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과태료 부과 조치로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더라도 그건 두 국가의 책임이며, EU는 이제 할 일을 다 했다며 돌아서 버린 격이다.

보렐 고위대표가 인정하지 않은 게 있다면 그건 코소보-세르비아의 협상 실패가 바로 EU의 중재자 역할 실패를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EU는 발칸반도의 안정을 위해 양국을 화해시키려는 노력을 2011년부터 기울여왔으나 두 나라의 해묵은 갈등은 잊을만하면 재연됐다.

중재자로서 EU의 무능은 쿠르티 총리가 미국의 요청을 단번에 수용해 과태료 부과 조치를 유예하기로 함으로써 더욱 두드러졌다.

연합뉴스

멜로니 총리 맞이하는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브뤼셀 AP=연합뉴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오른쪽)이 3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 EU 본부에서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를 맞이하고 있다. 지난달 22일 공식 취임한 극우 성향의 멜로니 총리는 첫 해외 방문지로 브뤼셀을 선택하며 EU 27개국의 분열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를 불식시키는 데 주력했다. 2022.11.04 ddy04002@yna.co.kr


물론 코소보와 세르비아는 EU 회원국이 아니어서 EU가 개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EU 회원국이라고 해서 EU가 중재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최근 국제구호단체가 운영하는 난민 구조선 수용 문제를 놓고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지난달부터 난민 구조선 4척의 입항을 불허해 국제 사회의 비난을 샀다.

프랑스 해상 구호단체인 SOS 메디테라네가 운영하는 난민 구조선 '오션 바이킹'은 이로 인해 3주 가까이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섬 인근 해상에 고립됐다.

프랑스 정부는 이탈리아 정부에 먼저 하선을 허용한 뒤 분산 수용을 논의하자고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오션 바이킹'을 자국으로 받아들였다.

이와 관련해 제랄드 다르마냉 프랑스 내무부 장관은 이탈리아가 오션 바이킹의 구조 요청을 무시한 건 "부끄러운 일"이고 "이기적"이라고 공개 비난했다.

이탈리아 정부도 가만있지 않았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프랑스의 반응은 이해할 수 없고 정당화될 수 없다"고 응수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관계가 역대 최악으로 치닫는 동안, EU는 이 문제에 대해 사실상 뒷짐만 졌다.

EU가 개입한 게 있다면 지난 4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멜로니 총리를 만나 난민 구조선을 먼저 수용한 뒤 배분을 논의하자고 제안한 게 거의 유일했다.

그러나 멜로니 총리는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입장은 바뀌었다"며 "우리에게 최우선 순위는 배분이 아니라 국경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EU는 2026년까지 이탈리아에 1천915억유로(약 264조원)에 이르는 코로나19 회복기금을 지원한다. 코소보와 세르비아는 EU 가입을 강력히 원하고 있다.

대화를 주도할 지렛대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현재의 EU는 갈등을 수습할 조정자의 역할을 거의 해내지 못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멜로니 총리와 같은 극우 세력이 등장한 데에는 EU의 무능함도 한몫했다.

EU에 가입해서 좋아진 것보다 나빠진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극우 세력이 득세하게 마련이다.

EU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국가는 과연 코소보와 이탈리아뿐일까. EU의 '무능 리스크'가 간단치 않아 보인다.

chang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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