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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인간들은 왜 다른 인간들을 ‘비인간화’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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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년 전부터 내려온 역사·정신사 탐구

인간 잔혹성은 어디서 유래했는지 분석

우리가 외면해온 인간 본성·이면 보여줘

비인간화, 아메리카 원주민 인간성 말살

노예제도 가동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

역사상 집단학살서도 결정적 위력 발휘

인간 이하/데이비드 리빙스턴 스미스/ 김재경·장영재 옮김/ 웨일북/ 2만2000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자명한 진리로서 받아들인다. 즉,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됐다는 사실, 창조주께서 모든 인간에게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부여하셨다는 사실, 그 권리 중에 생명과 자유를 누릴 권리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세계일보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다른 사람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바라보는 ‘비인간화’ 현상이 급증하고 있다. 하지만 비인간화는 혐오와 전쟁에서 폐해가 더욱 크다는 점에서 대응이 시급하다. 사진은 몇 해 전 벌어진 난민 혐오 시위.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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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토머스 제퍼슨이 기초한 ‘미국 독립선언서’의 일부다. 제퍼슨 같은 당시 계몽주의자들은 인간이란 평등한 존재이고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독립선언서 등을 토대로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이 모든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투쟁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심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단단히 잘못된 착각이다. 왜냐하면 당시 계몽주의는 인간이 존엄한 존재라고 인정하면서도, 노예제도가 가져다준 경제적 이점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심의 목소리와 경제적 이기심이라는 서로 다른 가치가 부닥치는 윤리적 딜레마 앞에서, 그들은 아프리카 노예란 결코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딜레마를 벗어났다.

세계일보

데이비드 리빙스턴 스미스/ 김재경·장영재 옮김/ 웨일북/ 2만2000원


다른 사람에 대해 인간답게 만드는 특별한 무언가가 결여돼 있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그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인식하는 행위이자 현상을 ‘비인간화’라고 부른다. 이 비인간화가 초래한 가장 극적인 폐해는 바로 홀로코스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46년 뉘른베르크에서 유대인과 러시아인, 폴란드인 수감자를 대상으로 의료실험을 했던 나치 의사 20명과 행정가 3명에 대한 전범재판이 열렸다. 검사 측은 첫 재판에서 엄중하게 공소사실을 밝혔다. “이번 사건의 피고인들은 의학 연구라는 명목으로 살인과 고문을 비롯한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피해자는 그 수가 수십만명에 이릅니다. … 이 살인범들은 가련한 피해자들을 개별 인간으로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피해자들을 도매금으로 묶어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했습니다.”

홀로코스트가 수감자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데에서 기인한 측면도 있다는 검찰 측 논고처럼, 나치는 유대인들을 운데르멘션(‘하위인간’)이라고 규정하고 말살 정책을 폈다. 히틀러 역시 1943년 유대인을 바이러스라고 공개 선동했다. “오늘날 전 세계 유대 민족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세계 곳곳의 민족과 나라를 썩어 문드러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바이러스를 박멸할 힘을 기르지 않는다면 세계는 계속 병들 것입니다.”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저자는 책에서 사람들이 왜 다른 사람이나 ‘그들’을 비인간화하는지, 어떻게 비인간화하는지 집요하게 파고든다. 1만년 전부터 내려온 인류 역사와 정신사를 탐구해 인간의 잔혹성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들여다보면서 우리가 외면해온 인간 본성의 실체, 이면을 보여준다.

책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인은 자신들을 제외한 이민족을 인간 이하의 짐승으로 묘사했다. 여기에서 짐승이라는 말은 단지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적이었다. 그리스는 이 같은 사고 덕분에 아무런 도덕적 제약 없이 제국주의를 꽃피울 수 있었다.

비인간화는 이성이야말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체계화한다. 그는 이방인을 향한 그리스인의 반감을 지적 허울에 덧입혀 이민족을 ‘바르바로이(야만인)’라고 분류했다. 이성이 없는 이들 존재는 인간 이하로, 지배받아야 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 자들은 주인에게 지배를 받는 편이 더 낫다. 만약 누군가가 다른 이에게 이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뿐 정작 본인은 이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그는 본질적으로 노예이다.”

특히 6세기 사형을 기다리며 ‘철학의 위안’을 펴낸 로마 철학자 보에티우스에 의해 비인간화 이론은 비약한다. 그는 인간이 인간성을 상실하면 악인이 되는데, 악인은 더는 인간이 아닌 짐승이라고 주장한다. “선으로부터 멀어진 모든 것은 존재 또한 멈추게 됩니다. 악한 자들은 더는 인간이기를 멈추게 되는 것이지요. 악행으로 말미암아 변질한 자를 계속 인간으로 바라볼 수는 없지요. … 어떤 강도가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보고 탐욕을 품으면 당신은 그를 가리켜 늑대 같다고 말하겠죠. 어느 다혈질인 사람이 늘 법정에 가서 혀를 쉬지 않고 놀린다면 당신은 그를 사냥개에 빗댈 것입니다.”

보에티우스는 선함을 잃어버린 사람은 더는 인간이 아닌 늑대나 사냥개, 여우가 된다고 말했다. 마침내 타자를 인간이나 노예가 아닌 존재, 즉 짐승이나 악마로 밀어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타고난 노예 이론’과 보에티우스의 ‘악마와 짐승 이론’은 중세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근세의 스페인 탐험가들과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을 정복하고 노예로 삼는 활동을 합리화했다.

그리하여 비인간화는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고 원주민의 인간성을 말살하는 과정, 노예제도를 가동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비인간화는 집단 학살에서 결정적으로 위력을 발휘했다. 헤레로 대학살, 아르메니아 대학살, 홀로코스트, 캄보디아 대학살, 르완다 내전, 수단 다르푸르 대학살….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을 인간이 아닌 개돼지, 벌레, 기생충으로 바라봤다. 1937년 12월 중국 난징에서 ‘난징대학살’을 저지른 일본 군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약 제가 그들을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그런 짓을 못 했겠죠. 하지만 저는 그들을 인간 이하의 짐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다른 일본군은 자신이 여성을 강간할 땐 그들을 인간이라고 여겼을지 모르지만 학살할 때만큼은 돼지쯤으로 여겼다고 진술했다.

인간의 전쟁은 동물 간 동족 살해 행위와 비교할 수 없이 압도적으로 잔인하다는 저자는 비인간화 현상은 문화적, 심리적, 생물학적 요인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며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과 인류의 문화, 인간 인식 구조가 결합한 결과라고 분석한다. 특히 비인간화는 최근 인종주의라는 양분을 먹고 자라고 있다고 우려한다.

비인간화 문제의 중요성과, 이론적 논의와, 실제 역사 속 사례와, 대안 모색 등을 한 권에 모두 담으려다 보니 다소 어렵고 산만하게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끈기 있게 읽어간다면 관용과 인내를 거의 소진해버린 우리 사회에서 비인간화라는 화두를 대면하게 할 둔중한 경고등이 될 수도 있겠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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