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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마음의 고향 ‘양촌리’ 시절에 대한 유일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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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간 방영 ‘최장수’ 작품 대본집

차범석 극작가 쓴 초기 내용 담겨

푸근한 농촌의 다양한 인물 얘기

정겨운 서사로 젊은 층 인기 확산

차범석의 전원일기 1, 2, 3/차범석 작·전성희 편/ 태학사/ 각 2만2000원

우리나라 안방극장을 22년간 터줏대감처럼 지켜왔던 ‘전원일기’ 대본집 1, 2, 3권이 나왔다. 1980년부터 2002년까지 무려 1088회가 제작됐는데 그 시작을 알린 1화 ‘박수 칠 때 떠나라’부터 49화 ‘시인의 눈물’까지다. 당시 방영물은 2화와 27화만 남아 있어, 더욱 소중한 대본이다. 고도 산업화 시대 부평초처럼 흔들리던 도시민의 뿌리가 되어줬던 농촌의 전형적이자 이상적 모델을 보여준 김 회장과 그의 가족, 일용과 일용네, 그 밖의 마을 사람들 등 국민과 함께 웃고 울었던 드라마 등장인물이 형성되고 마음의 고향이 된 ‘양촌리’가 국민 가슴에 깊이 각인되던 시절에 대한 유일한 기록인 셈이다.

세계일보

MBC에서 1980년 10월21일부터 2002년 12월29일까지 22년2개월 동안 ‘국민 드라마’로 사랑받은 ‘전원일기’. 1화부터 49화는 우리나라 희곡 역사에 사실주의 연극 확립으로 이름을 남긴 극작가·연극 연출가 차범석(1924∼2006) 작품이다.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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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일기와 차범석

MBC에서 1980년 10월21일부터 2002년 12월29일까지 22년2개월 동안 방송된 ‘전원일기’는 ‘국민 드라마’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드라마다. 김 회장네 집과 복길네를 중심으로 한 이웃 이야기가 옴니버스식으로 이어지면서 다양한 시대상과 인생의 가치, 교훈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담아냈다. 이 과정에서 정애란, 김혜자, 최불암, 고두심, 김용건, 유인촌, 김수미 등 지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생활 연기를 보여줬다.

이 작품이 지닌 가치는 그 기나긴 생명력에서도 입증된다. 요즘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 보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데 지난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는 인기 드라마 순위 톱10에 오르는 기현상도 벌어졌다. 문화평론가 등은 이를 두고 지금 젊은 세대에게도 ‘전원일기’의 고풍스러운 영상과 지금 드라마에선 찾아볼 수 없는 느리면서도 정겨운 서사가 매력으로 작용한 것으로 풀이한다. 특히 갈등만이 첨예화된 요즘 드라마들과 달리 ‘화해에 초점이 맞춰진 휴먼드라마’여서 안정감을 준다는 해석이다.

세계일보

차범석 작·전성희 편/ 태학사/ 각 2만2000원


초장수 드라마답게 역대 연출자는 총 15명이며 집필작가 역시 17명에 달하는데 그 시작은 ‘산불’, ‘귀향’ 등으로 우리나라 희곡 역사에 사실주의 연극 확립으로 이름을 남긴 극작가·연극 연출가 차범석(1924∼2006)이다.

차범석이 이 작품을 집필하게 된 계기는 1980년 5월 남도에서 일어난 비극으로 큰 실의에 빠진 상황에서 젊은 PD 이연현이 찾아와서 “이를테면 농촌을 소재로 한 편의 수필을 써 주면 된다”고 부탁하면서다. 평소 ‘왜 TV 드라마는 도시인들만을 대상으로 하는가. 왜 TV 드라마는 천편일률적으로 사랑 타령만 하면서 서민층이나 지역사회와는 담을 쌓는가’라는 불만을 품어 왔던 차범석이었기에 집필을 승낙했고 ‘전원일기’가 탄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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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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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차범석은 ‘전원일기’를 쓰게 된 이유를 “오늘의 농촌 실상을 도시인에게 보여주고 잊혀 가는 풍물이나 인정을 되살리자는 의도”도 있었지만, “절망하지 않기 위해 썼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대본으로만 남은 귀한 기록

‘전원일기’ 초기 방송분이 2, 27화만 남기고 지금 전해지지 않는 건 ‘물자난’ 때문이다. 보관 대신 재활용을 택한 것. 다행히 대본은 차범석 목포문학관에 대부분 보관돼 이번 출간이 가능했다. 워낙 친숙한 드라마여서 대본만 읽어도 마치 드라마를 보듯 머릿속에 생생한 영상과 대배우들의 구수한 음성이 떠오른다. 초기 대본에 나타난 김 회장은 농부이면서 가끔 글을 쓰고 기고도 한다. 문학을 아는 농부로 인정 많으면서도 ‘능청스럽고 유들유들한’ 성격으로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특히 차범석 작가 시절 ‘전원일기’ 특징은 김 회장 내레이션으로 문을 열고 닫는 점이다. 전설이 시작된 1화 ‘박수 칠 때 떠나라’에서 최불암은 이렇게 독백한다.

“나의 일과는 소장(축사)일부터 시작된다. 살아 움직이는 가축들의 눈망울에는 억척스런 삶이 있고 욕망이 있고 그런 애정이 있다. 나의 손을 기다리고 있고 나의 사랑을 갈망하는 가축들의 콧김이 손등에 와 닿을 때 나는 비로소 나의 삶을 의식한다. 그래서 또 하루가 시작된다. 영원으로 이어지는 순간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문학도의 ‘아취(雅趣)’가 물씬 풍긴다. 후대 김 회장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대목이다.

1화를 이끄는 사건은 김 회장과 아들의 씨름 대결. 면 체육대회에서 소싯적 기운깨나 썼던 김 회장은 술김에 둘째 아들과 대결한다. 둘째는 아버지와의 대결을 피하려 하지만 막무가내다. 대결 끝에 아버지는 결국 패하고 허리까지 다친다. 일용네에게 아들과 아버지의 씨름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씨름판으로 쫓아오고, 아픈 아버지에게 “늙었는데 안 늙은 척해 보이려는 심뽀”라며 지청구를 한다. 마침 딸을 보러 서울 간 할머니가 예정보다 빨리 귀향해선 이렇게 말한다. “떠나지 말라고 아우성칠 때 떠날 줄 알아야 한다.”

이어지는 김 회장 내레이션을 통해 차범석은 이렇게 일깨운다.

“그래, 만사는 때가 있다. … 내가 아니면 이 성을 지키고 갈 사람이 없다고 독단한다. 이런 사람에겐 박수갈채가 없다. 박수갈채를 받으며 떠날 줄 알아야 한다.”

이때 어머니가 나와서 뭐라 잔소리하며 등을 밀며 안방으로 들어간다.

F.O(페이드아웃).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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