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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책의 향기] 왜곡으로 얼룩진 나라에 민주주의의 자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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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현실을 어떻게 조작하는가/마리아 레사 지음·김영선 옮김/456쪽·1만8000원·북하우스

동아일보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16년 7월부터 대대적인 ‘마약과의 전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6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적법한 절차 없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페이스북(현 메타) 등 소셜미디어에선 필리핀 정부에 유리한 허위 조작 정보가 급속도로 퍼졌다.

필리핀 언론인 마리아 레사는 자신이 설립한 탐사보도 전문매체 ‘래플러’를 통해 이 같은 ‘조직화된 허위 행위’를 찾아내고 고발하는 기획기사를 연이어 보도한다. 이후 레사는 자신을 공격하고 사실을 왜곡하는 선동에 맞서 싸우고 있다. 그에게 구형된 누적 형량만 100년이 넘는다. 그는 소셜미디어 시대에 자극적인 거짓이 어떻게 진실을 가리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위협하는지 이 회고록을 통해 낱낱이 그리고 담담하게 밝힌다. 레사는 지난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2016년 9월 2일 오후 10시 두테르테 당시 대통령의 고향 다바오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해 10여 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 후 두테르테 정부는 계엄령에 준할 정도로 군을 동원했다. 당시 인터넷에선 ‘다바오 검문소에서 체포된 폭탄을 든 남자’ 기사의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이 기사는 폭발사고 발생 6개월 전의 기사였다. 래플러는 정부의 정보 작전을 통해 이 기사가 의도적으로 정부의 강압 정책을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고발했다.

레사는 소셜미디어에서 퍼지는 허위 조작 정보에 대해 메타와 구글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침묵의 공모’라고 비판한다. 레사는 2017년 구글의 싱크탱크 지그소와 함께 국가가 온라인에서 조작을 통해 혐오를 확산시키는 행태를 고발하는 보고서를 만들었지만 구글은 이 보고서 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레사는 필리핀에서 목격한 왜곡과 선동이 우리 모두의 미래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는 사실 없이 진실을 알 수 없고 진실 없이 신뢰할 수 없다. 이 세 가지가 없으면 공유하는 현실을 가질 수 없으며,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와 모든 의미 있는 노력은 끝장나고 만다.”

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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