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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8개월과 2년6개월의 차이는..? “동물학대범 ‘들쭉날쭉 처벌’ 해소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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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수원지방법원에 모인 동물보호단체 회원들은 격앙돼 있었습니다. 한 동물학대 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였습니다. 이날 수원지법 형사10단독(판사 이원범)은 동물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징역 8개월을 선고했습니다. A씨는 경기 화성시에 위치한 자신의 주거지와 일하던 편의점 창고 등에서 길고양이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등 4마리를 학대하고 1마리를 죽인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또한 그는 길고양이를 학대한 사진과 그 방법, 과정 등을 온라인 동물학대 채팅방에 게시하기도 했습니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범행 수범이 잔혹해 재발 방지를 위해 엄벌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며 “다만 범죄 전력이 없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동물단체 회원들은 법정에서 재판부를 향해 “8개월이 말이 되느냐”며 “이런 솜방망이 처벌 때문에 동물학대가 끊이질 않는다”고 강하게 항의했습니다. 이들은 A씨가 죽인 길고양이가 최소 80마리 이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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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법원의 판결을 ‘솜방망이 처벌’이라 주장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9월 대구지방법원 포항지원은 ‘길고양이 연쇄살해사건’의 범인 B씨에게 징역 2년6개월을 선고했습니다. B씨는 포항 한동대를 비롯해 도심 상가 등에서 길고양이 10여마리를 학대 및 살해했습니다.

두 사건은 다른 사건이지만, ‘범행의 잔혹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재발을 막기 위해 엄벌의 필요성이 있다는 것도 재판부가 모두 판결문에 명시했습니다. 그런데 징역 8개월과 2년6개월, 두 사건의 형량 차이는 매우 큽니다. 이렇게 판결마다 형량 차이가 큰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동물학대 사건을 처리할 ‘양형기준’이 없는 점을 꼽아왔습니다. 양형기준이란 법관이 합리적인 형량을 정하는 데 참고할 만한 객관적인 기준을 말합니다. 이 기준은 대법원 양형위원회에서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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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국회에서 열린 '동물범죄 양형기준 수립을 위한 토론회'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신주운 카라 정책기획팀장, 남종영 한겨레 기자, 전진경 카라 대표, 박미랑 한남대 경찰학과 교수, 유정우 부산고등법원 판사, 김영준 서울 강남경찰서 수사관, 서국화 동물권연구변호사단체 PNR 대표, 윤성모 카라 활동가. 동그람이 정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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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양형기준 수립을 촉구하는 동시에 방법을 모색하는 토론회가 국회에서 열렸습니다. 8일 동물권행동 ‘카라’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은 ‘동물 범죄 양형기준 수립을 위한 국회토론회’를 공동개최했습니다. 토론 패널로는 전진경 카라 대표, 박미랑 한남대 경찰학과 교수, 서국화 동물권연구변호사모임 PNR 대표 등 시민사회단체 및 학계 인사들과 유정우 부산고등법원 판사, 김영준 서울 강남경찰서 수사관 등 동물학대 사건을 다룬 경험이 있는 현직자들도 참석했습니다.

동물학대범에 대한 형량이 제각각인데 대해 박 교수는 “법관과 수사관이 동물학대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양형의 편차가 크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일례로 2018년 발생한 자신의 고양이를 창 밖으로 집어던져 상해를 입힌 C씨와 2020년 자신의 반려견을 배수관 파이프로 폭행한 뒤 종량제 봉투에 넣어 길거리에 유기한 D씨의 판례를 비교했습니다. C씨는 징역 1년을, D씨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박 교수는 미국과 영국의 양형기준 사례를 설명하며 “해외에서는 처벌기준 뿐 아니라 사육금지 제도 등 재발 방지책도 도입한 사례가 있다”며 “양형기준을 논의할 때 이 점도 적극 논의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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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랑 한남대 교수가 국내 동물학대 사례를 설명하는 발제를 진행하고 있다. 동그람이 정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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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동물학대 사건을 직접 다루는 현직 판사와 수사관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유정우 판사는 “양형위원회는 수천 건의 판례를 수집해 1년 가까운 시간을 들여 연구하고 분석한 뒤 양형기준을 수립한다”며 “반면 동물학대 범죄 판례는 10년간 200여건에 불과해 양형기준을 세우기에 유의미한 사례가 축적됐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동물학대 사건이 법원으로 잘 넘어가지 않는 이유에 대해 김영준 수사관은 “동물학대는 피학대 동물이 말을 할 수 없는 등의 한계로 수사 개시나 증거 확보에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양형기준의 필요성 자체는 공감했습니다. 김 수사관은 “양형기준이 세워진다면 일선 수사관들이 동물범죄 수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사건을 처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유 판사 역시 “양형기준이 필요하다는 시민들의 목소리에 깊이 공감한다”며 “해외 사례를 최대한 많이 참고하고, 양형기준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는 ‘규범적 접근방식’을 가미하는 등 현실적인 장애물을 뛰어넘어 양형위원들을 설득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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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강남경찰서 수사관이 토론에서 발언하고 있다. 동그람이 정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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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토론회에서는 동물학대 범죄 판결에 대한 법원 안팎의 인식차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서국화 대표는 “동물학대 범죄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형사사건에 대한 국내 판결이 약한 편”이라고 지적했는데요. 이 발언에 대한 유 판사의 의견을 묻자 그는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 결정을 내리는 만큼 늘 신중해야 한다"며 "보수적으로 보일 순 있겠지만,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양형사유 외에도 판사는 다양한 사유를 검토해 종합적으로 판단한다"고 이해를 구했습니다.

이날 토론회에는 김영란 양형위원장도 참석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축사를 통해 “적지 않은 국민들이 양형위에 동물학대 범죄에 대한 엄정한 대처와 양형기준 설정을 요청했다"며 "논의 내용을 비롯해 국민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고 동물학대 범죄의 양형 합리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전했습니다. 카라는 김 위원장에게 동물범죄 양형기준 수립을 촉구하는 시민 2,700여명의 서명부를 전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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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토론회에는 김영란 대법원 양형위원장이 찾아 토론을 경청했다. 카라 전진경 대표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조정훈 의원이 '동물범죄 양형기준 수립을 촉구하는 시민 서명부'를 김 위원장에게 전달하는 모습. 동그람이 정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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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8기인 양형위의 임기는 곧 끝납니다. 내년 4월부터는 9기 양형위가 업무를 이어갈 예정입니다. 토론을 마치고 만난 전진경 카라 대표는 “단순히 양형기준이 필요하다는 데서 벗어나 현장의 다양한 사정과 어려움을 확인한 만큼 오늘의 토론 내용을 잘 반영해 활동하겠다"며 9기 양형위에서 동물학대 범죄의 양형기준이 수립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정진욱 기자 leonard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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