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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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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역사는 1월 6일 의사당 테러를 어떻게 기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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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디아 폴그린(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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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opher Lee for The New York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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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아 폴그린(Lydia Polgreen) / 오피니언 칼럼니스트

총기와 폭탄, 탄약을 잔뜩 쟁여둔 극우 단체들이 자기들 보기에 정통성이 없는 정부를 힘으로 제압하고 전복하려 한다. 공중파 방송에 나온 언론인들은 반유대주의를 버젓이 입에 올린다. 주요 정치인들이 혐오와 편견에 기대 득세한 다른 나라 권위주의 지도자를 공개적으로 찬양한다. 그러는 사이 민주주의와 법치는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지난 몇 년간 미국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위의 이야기는 지난 세기에 미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어난 일을 묘사한 것이다. 꼭 들어볼 만한 신규 팟캐스트 울트라(Ultra) 첫 화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바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서 일어난 일이다. 당시 나치의 선전원들은 미국의 극우 단체들을 집중 공략했고, 미국 우선주의를 부추겼다. 상·하원 의원실 곳곳에 침투한 이들은 위에서 묘사한 대로 미국 정부를 뒤엎을 음모를 꾸몄다.

"오늘 이야기는 정치적 스펙트럼의 가장자리에서 일어난 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또 이런 극단주의가 초래할 위험을 끝내 가로막지 못한 사법 제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울트라의 진행자 레이첼 매도우가 한 말이다. 모두가 아는 뛰어난 언론인 매도우는 2차대전 당시 나치의 상황과 지금(의 미국)을 섣불리 비교하지 않았다. 하지만 팟캐스트를 한 회 한 회 들을수록 2021년 1월 6일 일어난 의사당 테러에 관해 한 가지 궁금증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이 사건과 이후의 소요는 미국 역사에 중요한 분수령으로 기록될 만한 일인가? 아니면 (매도우가 그런 것처럼) 몇십 년이 지나 2200년 언저리에 누군가가 "많은 사람이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의 한 조각"이라며 언급할 정도의 소재에 불과할까?

지금 일어나는 일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지 물어보면, 역사학자들은 농담조로 "100년 뒤에 다시 물어봐 주세요."라고 말하곤 한다. 지난해 1월 6일 의사당에서 일어난 폭동과 테러를 조사해온 하원 조사위원회가 이번 주 초 조사 결과를 보고서로 펴냈다. 약 1년 반에 걸친 조사 활동을 망라한 보고서는 그 두께부터 남달라 역사에 중요하게 남을 자격을 갖춘 것처럼 보인다. 언론인, 역사학자,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곧바로 보고서를 둘러싼 수많은 분석을 쏟아내고 있고, 앞으로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뒤따를 것이다.

다음 달 시작하는 새 회기 의회에선 공화당이 하원 다수당 자리를 되찾는다. 공화당 의원 가운데는 1월 6일 의사당 테러 조사위원회의 활동이 적절했는지를 오히려 조사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이도 많다. 그 밖에도 이번 회기에서 논의되지 않은 다양한 의제가 등장할 것이다. 화수분처럼 쏟아내는 의제와 문제들에 관해 어떤 결론이 나올지는 모르겠다. 그저 어떻게든 세간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릴 수만 있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올해 중간선거를 앞두고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인들은 의사당 테러보다 다른 문제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다. 게다가 트럼프에 동조하며 선거 결과를 부정하는 인사들이 주요 경합주 의석의 절대다수를 차지해 지역 정치를 마음대로 주무를 거란 우려가 다행히 현실이 되지 않으면서 의사당 테러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미국이 스스로 역사를 어떻게 기록하고 기억하는지는 조금 다른 문제다.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파급력이 커질 문제이기도 하다.

그 전에 좀 더 근본적인 문제에 관해 생각해보자. 즉, 우리는 왜 무언가를 기억하는가? 또 우리가 잊어버린 건 어쩌다 기억해야 할 대상에서 빠지게 된 걸까? 지금처럼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를 두고 갈라진 세상에서 이는 절대 가벼이 다룰 문제가 아니다. "과거를 잊은 이들에게는 반드시 그 일이 다시 일어난다." 또는 이와 비슷한 격언을 다들 들어보셨을 거다. 하지만 그런 말을 접할 때마다 나는 한편으로 "우리는 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싸우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레이첼 매도우가 팟캐스트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매우 특별하다. 조지 실베스터 비에렉이라는 독일계 미국인이 이야기의 주인공인데, 그는 나치 독일의 요원이었다. 비에렉은 1930년대 나치가 미국에 영향을 끼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훗날 미국 법무부가 나치의 영향을 조사할 때도 비에렉을 중심으로 조사가 이뤄졌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비에렉을 다방면에서 도운 미국 의원들도 있었다. 한 상원의원은 유명한 잡지에 독일에 우호적인 기명 칼럼을 썼는데, 해당 의원은 이름만 빌려줬을 뿐 실제로 글을 쓴 건 비에렉이었다.

이 의원이 본회의장에서 한 연설 중에도 독일을 칭찬하는 연설이 많았는데, 연설문은 나치 정부 관료들이 썼다. 의회 내 친독파들은 해당 연설, 칼럼을 부지런히 재가공해 미국인들에게 알렸다. 미국 국민이 낸 세금이 나치를 홍보하는 데 쓰인 셈이다.

비에렉은 또 노골적인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를 표방하는 단체들을 지지하고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댔다. 비에렉과 나치가 지원한 단체들은 미국 전역에 퍼져 있었는데, 여기에는 실버 셔츠(Silver Shirts), 기독교 전선(Christian Front) 등 준군사조직도 포함된다. 이들은 무력으로 미국 정부를 전복한 다음 나치와 성향이 비슷한 독재 정권을 세우고자 했다.

당시에 이 소식은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신문사들은 나치에 연루된 의원들의 실체를 밝혀내는 특종 경쟁을 벌였다. 검사들은 범죄 혐의가 확인된 이들을 줄줄이 기소했다. 재판 결과도 한동안 주요 소식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무척 떠들썩했던 이 사건을 지금은 아무도 모른다. 의회 역사 연구의 권위자 가운데 한 명인 낸시 벡 영은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아마도 자신이 재직 중인 휴스턴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중에도 나치 독일이 미국 정치에 개입하려 했던 이 스캔들을 아는 사람이 한두 명밖에 없을 거라고 말했다.

이 사건은 어쩌다 망각의 영역으로 흘러 들어간 것일까? 사실 미국 역사는 이러한 선택적 기억 상실로 점철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인들이 식민지 정착과 건국 과정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잔혹하게 대량 학살한 사실은 모두가 집단으로 애써 외면하는 대표적인 역사다. 미국 역사에 노예제가 끼친 영향은 늘 간과된다. 제국주의 미국이 저지른 수많은 일도 마찬가지다. 수잔 손탁은 이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집단 기억이라 부르는 것은 정확한 기억하기의 결과가 아니다. 그보다는 무엇이 중요하고, 과거의 어떤 일과 관련해 이 부분에만 주목하고 기억하면 된다는 강력한 규정이 만들어낸 결과에 가깝다."

우리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늘 비슷한 영웅 서사를 따른다. 결론에 가면 꼭 미국이 영웅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다. 가장 익숙한 단골 소재는 아마도 2차 세계대전일 것이다. 어둠의 세력에 맞선 정의의 사도 미국이 세계 평화를 지켜냈다는 다분히 편향적인 해석은 수많은 책과 영화, TV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그중 일부는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그 어둠의 세력이 정의의 사도인 미국 내에서 든든한 조력자는 물론 열정적인 추종자까지 거느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모른다. 상원, 하원의원 중에는 적국의 나팔수를 자처한 이들이 있었다.

어둠의 세력 나치를 지지하는 미국인들도 전국에 걸쳐 상당히 많았다. 대부분 유럽에 있는 유대인들의 운명에는 별 관심이 없는 이들이었다. 지난 9월 개봉한 켄 번스, 린 노빅과 새라 보스테인 감독의 다큐멘터리 "미국과 홀로코스트"는 시청하기 무척 괴롭지만, 사실관계를 자세히 담아낸 수작이다. 악독한 반유대주의자 찰스 코플린 목사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라디오쇼 진행자였다. 1930년대 전성기를 구가한 그의 방송은 유대인과 공산주의를 향한 비판으로 가득했는데, 한때 주간 청취자 숫자가 9천만 명에 달했다.

어떤 측면에선 이 시기를 예외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미국의 극우 세력이 한동안 표방했던 미국 우선주의는 진주만이 공격받은 직후 급격히 종적을 감췄다. 아마도 어둠의 세력에 여지를 줬던 미국의 역사는 잊어야 마땅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이번엔 또 할 일이 너무 많았다. 폐허가 된 유럽을 재건해야 했고, 참전 군인들이 다시 민간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갖춰야 했다. 소련과의 핵전쟁 위험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1930년대에 나치 독일에 우호적이었던 이들을 골라내고 처벌하는 일에는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나설 틈이 없었다고 하는 게 정확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역사가들도 이 시기를 피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가 브래들리 하트는 2018년에 펴낸 책 "히틀러의 미국 친구들"에서 이 문제를 다뤘다. 그는 이 시기에 관해 알려진 자료들이 상당히 많지만, 이 주제에 관한 역사학계의 연구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고 말한다.

"사실 이 시기는 미국 역사에서 무척 불편한 시기이기도 해요. 사람들은 그저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다는 점만 기억하려고 하죠. 앞으로 나아가려면 역사의 어떤 부분은 묻고 가는 편이 낫다는 일종의 공감대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결혼 생활을 해온 분이라면 때로는 잊어주는 것이 평안을 얻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아실 거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아르헨티나처럼 서로 다른 집단 사이에 심각한 갈등을 겪은 뒤 지난한 화해의 과정을 거친 나라들도 '언제까지 싸우기만 할 거냐', '이제 그만 지난 일은 덮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압박을 끝내 피하지 못했다. 결국, 화해는 적과 하는 것이다. 친구와는 싸울 일이 없으니 화해할 일도 없는 법이다.

지난해 1월 6일 의사당 테러 이후 미국 사회의 모습은 매도우가 팟캐스트에서 소개한 나치 독일의 상황과 판박이다. 나치를 선전하거나 나치의 주장에 공개적으로 동조했던 인물 중에 기소된 사람은 거의 없다. 내란 혐의로 시작된 재판은 제대로 된 심리도 열어보지 못하고 흐지부지됐다. 상원의원 출신인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나치의 나팔수였던 자신의 오랜 친구 버튼 휠러 상원의원을 도우려고 법무부에 외압을 넣었다. 나치의 선전·선동 전략에 가담한 이들을 수사하던 검사는 끝내 해고됐다.

그래도 나치의 편을 들었던 주요 정치인들은 결국 유권자들로부터 외면받아 줄줄이 낙선한다. 정치인이 받을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심판을 받은 것이다.

1월 6일 의사당 테러에 가담한 이들 상당수는 법의 심판을 받았다. 900여 명이 체포됐고, 470여 명에 대해 연방법을 어긴 혐의가 인정됐다. 기소된 이들 중에 335명에게 유죄 판결이 났고, 250명 이상은 수감되거나 가택 연금 처분을 받았다. 극우 성향 준군사조직 오스 키퍼스(Oath Keepers)를 이끄는 스튜어트 로즈에 대해 법원은 내란 음모죄를 인정했다. 이번 테러와 관련해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재판이었다.

하원 1월 6일 조사위원회는 조사 결과 보고서에서 추가로 기소가 이뤄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와 관련해 모두가 궁금해하는 점은 역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기소 여부다. 2021년 1월 6일 워싱턴 D.C.에 모인 사람들이 의사당에 난입해 폭력을 저지르는 데 트럼프가 어떤 식으로 개입하고 영향을 끼쳤느냐가 관건이다.

좀 더 근원적인, 정치적인 심판은 당장은 일어날 가망이 없어 보인다. 선거 결과를 부정하던 음모론자나 1월 6일 테러를 옹호하던 인사들은 지난 중간선거 경합 지역에서 대부분 패했다. 그렇지만 지난 선거는 2020년 대선을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는 사람 200여 명을 당선시킨 선거이기도 하다.

더 큰 줄기에서 미국에 관한 어떤 이야기를 기록해야 우리는 1월 6일 테러를 잊지 않고 기억할까? 반대로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면 1월 6일에 일어난 일은 그저 잠깐의 일탈로 여겨지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질까? "100년 뒤에 다시 물어봐 주세요."라는 역사학자들의 답변은 일리가 있다. 다만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단기적인 계산에 얽매여 정치적인 꼼수를 부리면 안 된다. 그랬다가는 어떤 일이든 기록되고 기억되기보다는 지워지고 잊히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고, 사고팔 수 있는 재산으로 여긴 노예제는 미국에 엄연히 존재한 역사다. 그러나 오랫동안 노예제는 미국 역사의 주변부에 머물렀다. 수많은 학자, 활동가, 언론인의 노력이 없었다면, 노예제는 지금처럼 미국 역사의 중심에 자리 잡지 못했을 거다.

현재 비판적 인종 이론(critical race theory)에 관해 벌어지는 많은 논쟁만 해도 그렇다. 흑인들은 민권을 쟁취하기 위해 오랫동안 목숨 걸고 날것의 목소리를 내왔으며, 이 싸움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과정을 사뭇 다르게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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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구 기자(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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