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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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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의 입, 한-이란 관계의 ‘적’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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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이란 관계, 현실주의 외교 모범적 사례

이란에서 한국은 호황 누리고 한류 열풍

미 제재로 한국에 이란 자금 70억달러 동결

윤 대통령 ‘엉뚱한 실언’ 불똥은 어디로 튈까


한겨레

돈독했던 한국-이란 관계의 상징인 서울의 테헤란로와 테헤란의 서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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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적은 이란’이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실언으로 한국-이란 관계가 크게 휘청이고 있다. 오랜 기간 우정을 나눠오던 다져온 양국 관계는 미국의 2018년 제재 복원으로 한국에 동결된 이란의 석유수출 대금 70억달러(약 8조7150억원) 문제로 최근 어려움을 겪어 왔는데, 윤 대통령의 엉뚱한 실언이 이런 흐름을 악화시키진 않을지 우려된다.

한국과 이란 관계는 국제무대에서 현실주의 외교의 모범적이고 독특한 사례로 손꼽혀 왔다. 두 나라가 수교한 것은 이란 이슬람 혁명(1979년) 이전인 1962년 10월이었다. 이란에게 한국은 서방 진영 중에서 가장 우호 관계를 지속해 온 나라였고, 한국에게 이란은 8천만명에 달하는 거대한 시장과 풍부한 자원을 가진 중동의 대표적인 우호국이었다.

수교 직후인 1970년대 한국 건설업체들은 중동 건설 붐의 핵심 국가인 이란에 많이 진출했다. 외교부는 2016년 펴낸 <이란 개황>에 당시 “2만명 이상의 한국인이 이란의 건설시장에 진출해 양국 관계의 기반을 닦았고, 이는 우리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고 적었다. 1977년 테헤란 시장 방한을 계기로 두 나라는 서울과 테헤란의 주요 도로에 각각 ‘테헤란로’와 ‘서울로’란 이름을 붙였다. 한국에서 외국의 지명을 딴 도로는 테헤란로가 유일하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이 일어난 뒤 이란은 서방 선진국들과 협력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 그 빈틈을 메운 국가가 한국이었다. 이란에서 한국 건설 회사들과 한국의 가전제품은 독보적 경쟁력을 갖고 호황을 누려왔다. 양국 교역이 고조되던 2011년 한국은 이란에 60억6800만달러를 수출했고, 원유 등 113억5800만달러를 수입했다. 두 나라 교역량은 무려 174억2600만달러에 달했다. 석유 수입분을 제외한다면, 한국은 이란을 상대로 엄청난 무역흑자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접어들며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문화였다. 이란이 이슬람 혁명 이후 서구 문화를 금지하자, 그 대체재로 떠오른 것이 한국의 드라마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6년 5월 이란을 방문하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최고 지도자는 “<주몽>을 자주 봤다”며 한국 드라마를 화제로 삼았다. 양쪽 참석자들은 파안대소했다. 이란 쪽은 하메네이가 외국 지도자와 면담에서 웃는 일은 드물다고 밝혔다. 이란에서 2008년 말부터 <전설의 왕자>란 이름으로 방영된 이 드라마의 시청률은 60%를 넘었다. 이란이 한국에 대해 갖는 호감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이에 앞선 2006년 소개된 <대장금>은 2006년 <궁궐 속 보석>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됐다. 평균 시청률은 57%, 최고 시청률은 90%를 찍었다. 일반적인 텔레비전 시청 가구는 모두 <대장금>을 봤다는 얘기다. 이런 인기 대문에 <대장금>, <주몽> 등의 출연자들이 이란을 방문하면, 이들을 보기 위해 인산인해로 사람이 몰렸다.

이란이 국제 사회와 본격 불화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불거진 ‘핵개발 의혹’ 때문이었다. 2002년 8월 이란 반체제 인사들로 구성된 이란국민저항위원회(NCRI)는 이란이 중부 도시 나탄즈에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알리지 않는 우라늄 농축시설, 아라크에는 중수로를 건설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거듭된 결의에도 이란이 우라늄 농축을 멈추지 않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10년 ‘포괄적 이란 제재법’ 시행에 들어갔다. 이후 이란과 국제 사회 간의 정상적인 수출입 결제가 불가능해졌다.

한국과 이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나라는 어쩔 수 없이 우리은행과 IBK기업은행에 원화 결제계좌를 만들었다. 한국이 이란산 원유 수입 대금을 여기에 예치하고, 한국 기업들이 이란에 수출하는 물품의 대금을 이 자금에서 지급받는 ‘결제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한국이 이란에서 수입하는 원유 대금이 한국이 이란에 수출하는 금액보다 컸기 때문에 돈은 점점 쌓여가기 시작했다.

한국과 이란 관계에 결정적인 위기가 찾아온 것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 핵 개발 속도를 늦추기 위해 2015년 7월 체결한 이란 핵협정(JCPOA)을 일방 탈퇴한 뒤였다. 미국은 2018년 5월 협정 탈퇴를 선언하고 그해 8월부터 이란산 원유 수입을 금지했다. 또 2019년 5월부터는 원화 결제계좌에 대한 제재 면제 연장도 거부했다. 한국 입장에선 무려 70억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돈을 돌려줄 방법이 사라진 것이다. 이후 양국의 교역량은 2019년에 24억1600만달러로 급감했다.

미국의 경제 제재로 인해 경제난을 겪기 시작한 이란은 한국에 묶여 있는 이 70억달러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이란은 2020년 이후 지속해서 한국에 돈의 반환을 요구했다. 문재인 정부는 이에 응하려 했지만, 대이란 제재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인 2021년 새해 들어서 사고가 터진다. 1월4일 이란 혁명수비대(IRGC)가 페르시아만 환경 오염을 이유로 호르무즈 해협에서 한국 국적 선박 ’한국케미호’를 나포하고 선원들을 억류한 것이다. 당시 코로나19 백신을 구하지 못해 쩔쩔매던 이란은 한국을 향해 “당신들이 동결해 둔 70억달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돈”이라고 말했다.

피랍 직후 최종건 당시 외교부 제1차관이 이란에 급파돼 협상을 벌인 끝에 배와 선원들의 조기 석방을 이끌어 냈다. 이란은 이란 핵협정 복원을 내세운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2021년 1월 출범을 계기로 미국과 관계 개선을 원했다. 한국도 미국을 설득해 이란과의 관계 개선 필요성을 언급하며 ‘70억달러’를 돌려줄 방법을 찾으려 했다. 이란도 선원들의 조기 석방으로 이런 움직임에 호응했다. 선장 등 모든 선원들과 배는 억류 95일 만인 2021년 4월9일 풀려났다. 한국과 이란의 오랜 신뢰 관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외교 성과였다.

하지만, 70억달러는 여전히 동결 중이다. 미국과 이란의 핵협정 복원 교섭이 여전히 교착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제재를 풀지 않는 한 이 돈을 돌려줄 방법을 찾긴 쉽지 않다.

그러는 사이 한국을 바라보는 이란의 감정이 조금씩 악화해 왔다. 한국 선원들을 석방한 직후인 2021년 4월17일 이란의 최고 유력 보수일간지 <카얀>은 1면에 70억달러를 돌려주지 않는 한국 선박들의 호루무즈 해협 통과를 봉쇄해야 한다는 주장을 실었다. 이 신문의 편집장 호세인 샤리아트마다리는 “우리는 한국으로 향하는 짐을 실었거나 한국에서 출발한 한국 상선, 원유 수송선 등 모든 선박의 호르무즈 해협 통과를 막을 수 있고 막아야만 한다”며 “그들이 우리나라에 빚지고 있는 70억달러를 돌려줄 때까지 그 통행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친 주장을 폈다.

양국 관계가 다시 큰 상처를 받은 것은 지난해 10월29일 밤에 벌어진 이태원 참사 때였다. 이 참사로 이란 국민 5명이 숨졌다. 그 직후인 10월31일 나세르 칸아니 이란 외교부 대변인은 기자회견에서 “불행히도 이번 사고로 이란인 5명이 목숨을 잃었다”며 “한국 정부가 관리 방법을 알았다면, (핼러윈) 행사 관리를 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한국 정부는 발끈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튿날인 11월1일 “정부는 이런 언급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고 유감을 표명하고, 향후 각별한 주의 및 재발 방지를 이란에 강력히 요청했다”고 밝혔다. 일부에선 한국이 참사를 당한 이란 쪽에 오히려 화를 냈다며 정부의 부적절한 대응을 지적했다.

칸아니 대변인은 석달 뒤 다시 한국을 향해 독설을 쏟아내게 된다. 이번에 겨냥한 이는 다름 아닌 윤 대통령이었다. 그는 ‘UAE의 적은 이란’이라는 발언에 대해 ’완전한 무지’라며 한국 외교부의 해명을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이란은 한국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다. 윤 대통령의 엉뚱한 실언으로 이란의 분노가 어느 쪽으로 튀게 될지 심히 우려된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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