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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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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父子) 배우 박민성·박이든, “아빠와 한 작품…이건 운명”[뮤지컬이 된 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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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루드윅’에서 삼촌ㆍ조카로 호흡

아빠와 같은 길 걷는 아들 꿈 반대 불구

‘루드윅’ 오디션 준비 하루 10시간씩

원하는 길 가려는 아들 노력에 감탄

“스스로 느끼면서 배우의 길 걷길”

헤럴드경제

아빠와 아들은 남들보다 빨리 동료가 됐다.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우연찮게 섰던 첫 작품 ‘여명의 눈동자’를 계기로 아빠를 따라 뮤지컬 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박이든(왼쪽)과 아빠 박민성은 지금 한 무대에 서며 관객과 만나고 있다. 이상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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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빵, 빵, 빵”

그랜드 피아노가 한가운데 놓인 작은 무대를 요리조리 뛰어다닌다. 삼촌 베토벤과 조카 카를의 ‘총싸움 동선’이 완벽하다. ‘성스러운 악보’가 휘날리지도 않고, 피아노 다리와 ‘접촉 사고’가 생기지도 않는다.

이때 조카를 붙잡으려던 삼촌의 한 마디. “누굴 닮아 엉덩이가 이렇게 빵빵해?” 일종의 ‘자화자찬’(?)형 애드리브다. 한 무대에 서며 대를 이어 뮤지컬 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박민성(41)·박이든(12) 부자다. 두 사람은 뮤지컬 ‘루드윅:베토벤 더 피아노’(3월 12일까지·예스24스테이지)에서 삼촌과 조카로 호흡을 맞추고 있다.

어느덧 데뷔 4년차. 작품으로 치면 세 편째다. 아역 배우 박이든은 이 작품에서 특히 바쁘다. 110분의 무대에서 무려 네 번이나 얼굴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어린 베토벤, 어린 카를, 발터는 물론 어린 베토벤을 연기하며 베토벤의 아빠가 돼야 하는 부분까지 있어 ‘루드윅’에서만 4개의 캐릭터를 보여줘야 해요. 네 캐릭터를 분류해 전부 다르게 표현하려고 분석을 많이 했어요.” (박이든)

제법 ‘프로’ 티가 날 만큼 자신이 역할을 끊임없이 연구하며 마주한다. 최근 대학로에서 만난 박이든은 “아빠가 무대에 가만히 앉아 있을 때마다 부럽기도 하다”며 웃었다. 네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만만한 일은 아니다.

아빠 박민성은 이 작품에서 오직 ‘중년 베토벤’만을 연기한다. 물론 이 역시 고난도다. 가만히 듣고 있던 ‘친구 같은 아빠’가 발끈한다. “이든아, 아빤 그 시간 동안 기를 쫙 모았다가 한 방에 ‘에네르기 파’를 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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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감치 자신과 같은 길을 걷게 된 아들의 꿈을 박민성(왼쪽)은 무척이나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의 꿈을 막을 수는 없었다. 데뷔 4년차에 어느덧 세 작품으로 무대에 선 박이든은 누구보다 자신의 캐릭터를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는 배우가 돼가고 있다. 이상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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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 인생 전환점…아빠 따라 뮤지컬 배우의 길아들은 “아무것도 모르던 때”에 무대에 처음 섰다. 2019년, 아빠 박민성이 주연을 맡은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를 통해서다.

“당시 프로덕션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갑작스럽게 아역 배우를 찾아야 했어요. 배우에는 아무런 뜻도 없는 아이를 급하게 구슬려 무대에 섰던게 화근이 됐는지, 이 길을 가게 됐어요. (웃음)” (박민성)

아홉 살 박이든의 인생에 난데없이 찾아온 ‘전환점’이었다. 사실 쉽지 않은 작품이었다. 동명의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에서 박이든은 ‘제주 4.3 사건’으로 총살을 당하는 장면을 연기했다. 무대엔 총소리와 비명이 난무했다. 박민성은 “어린아이가 하기엔 무척 힘든 장면이었다”며 “무대에 오른 아이들이 울고 뛰쳐나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떠올렸다.

첫 대사는 ‘엄마’.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전문적으로 연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평소 엄마를 부르듯이 했던 것 같아요.” (박이든) “아무것도 몰랐다”지만, 무수히 많은 관객 앞에 섰던 경험은 자신감으로 돌아왔다.

아빠와 아들은 남들보다 빨리 같은 길을 걷는 ‘동료’가 됐다. 아빠의 마음이 편치는 않다. 사실 박민성은 강경한 ‘반대파’였다. “제가 걸어온 길이니 얼마나 힘든지를 알잖아요. 지금도 대한민국에 이 일을 하려는 친구들이 무수히 많지만, 0.001%도 살아남지 못해요. 재능이 있어도 빛을 보지 못하는 게 이 직업인데, 그로 인해 자존감을 다치고 상처를 입을까 걱정했어요.”(박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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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루드윅’에서 삼촌 베토벤과 조카 카를로 만난 박민성 박이든 부자 [과수원컴퍼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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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아빠의 생각과는 반대로 흘러갔다. 박이든은 “어린시절 아빠의 무대를 많이 봐오며 멋있다,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 때엔 뮤지컬 배우를 꿈꾸진 않았다. ‘여명의 눈동자’는 도화선이었다. “그 작품 이후로 공연이 너무 하고 싶었어요.” 그러다 아빠 몰래 ‘프랑켄슈타인’의 아역배우 오디션에 지원하게 됐다.

“제가 먼저 캐스팅된 상황이었는데, 연출님이 혹시 네 아들이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이 얘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래서 다른 친구들과 실력이 비등하다면 시키지 말아 달라고 부탁까지 했어요.” (박민성)

아빠의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쉽지 않은 무대인 데다, 대극장과 대학로를 종횡무진 오가는 15년차 뮤지컬 배우인 ‘아빠의 후광’이 독이 될까 염려했다.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아빠 백으로 와서 실력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아들의 생각은 달랐다. 박이든은 “아빠가 어떤 이유에서 걱정하는지 알고 있어 이해는 하지만,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고 말했다. 뮤지컬 무대가 이든 군에겐 꿈이자 학교였고, 사회였다.

“뮤지컬을 하다 보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돼요. 그 사람들을 통해 배우는 것이 너무나 많더라고요. 다른 배우 분들이 하는 걸 보면서, 나도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생각하기도 하고요. 배울 수 있는 게 많다는 점이 좋았어요. 연기하고 노래하는 것도 재밌고, 사람들 만나는 것도 좋고요.” (박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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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배우 박민성(오른쪽)과 박이든. 이상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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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 보려 하루에 10시간씩 피아노 연습…“운명같은 작품”‘루드윅’을 통해 아빠와 한 무대에 서는 것은 “운명같은 일”이라고 했다. ‘루드윅’은 오래 품은 꿈이었다. 유튜브를 통해 공연 영상을 찾아볼 때 꼭 한 번 하고 싶은 역할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피아노’였다. 작품에선 직접 베토벤을 연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려 ‘월광 소나타 3악장’이다.

“오디션을 보기 위해 한 달 동안 하루에 10시간 이상 피아노를 쳤어요. 처음엔 ‘월광’으로 오디션을 보는지 모르고 다른 곡을 연습했다가, 2주 전에 알게 돼 그것만 다시 연습했어요. 사실 피아노는 악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바이엘 수준도 되지 않았어요. 학원에 가서 선생님이 손가락을 알려주면 그걸 그대로 외어서 했어요.” (박이든)

아들의 집요함에 아빠는 혀를 내둘렀다. “집에 있을 때는 이든이의 피아노 소리 때문에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요. 지금이야 능수능란하게 치는데, 그 때는 그냥 드르륵, 드르륵 소리에 노이로제가 오더라고요.” (박민성)

무대는 그렇게 완성됐다. ‘떴다 떴다 비행기’를 겨우 치던 아들은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오디션 합격 티켓을 따냈다. 그제야 아빠의 마음도 열렸다. “저희 가족 중 그 누구도 이렇게 시간을 들여 결과를 만들어낸 적은 없었어요. 이든이가 그걸 보여주더라고요. 이든이는 뭘 해도 하겠구나 싶었어요.” (박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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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루드윅’의 오디션을 보기 위해 박이든은 하루에 10시간씩 한 달간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3악장’을 연습했다. [과수원컴퍼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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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윅’의 첫 연습날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박민성은 “혼자가 아니라 이든이와 함께 여서 더 조심스러웠다”고 돌아봤다. 연출진과 배우들에겐 자신을 “신경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현장에서 울든 욕을 먹든 칭찬을 받든 내버려뒀어요. 제가 먼저 나서면 꼴불견이고, 아이한텐 더 안 좋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빠가 선배라고 ‘연기 조언’이나 ‘지적’을 하는 일도 없다. 뮤지컬에서 아역 배우의 연기는 오로지 ‘연출부의 권한’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역의 연기는 성인 배우들처럼 각자의 것으로 소화해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연출의 디렉팅에 그대로 따라야 해요. 거기에서 변형된 것이 나오면 잘못된 연기고, 연출에 거스르는 연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일절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않아요.”

무대 위에서 아이의 꿈은 매일 같이 자라난다. 박이든은 “공연을 띄엄띄엄하다 보니 한 작품이 끝나면 후유증이 있다”고 말했다. “공허해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작품에 더 집착하기도 해요.” (박이든) 그렇게 스스로 배우의 길을 가고 있다.

그 성장을 함께 하는 아빠의 마음은 더 각별해진다. 박민성은 “‘루드윅’의 대사 중에 아이는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라는 것이라는 대사가 있다”며 “이 작품을 이든이와 함께 하며 부모로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같은 길은 걷는 부자 배우는 더 먼 미래를 꿈꾼다. 박이든은 “설득력 있는 연기로 오만 감정을 전달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노래도 잘 하는 배우가 목표다. 박민성도 “아직 목표한 것을 이루지 못했다”며 “무대에선 아빠이기 이전에 배우가 우선이다. 배우 박민성으로의 길을 꾸준히 갈 것”이라고 했다. 아들의 길을 지켜보는 아빠는 해주고 싶은 말이 많다.

“정상은 하나인데 가는 길은 수천 갈래잖아요. 목표를 정확하게 두고, 양심에 거스르는 길만 아니면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든이는 제가 가는 길을 답습할 필요도 없고, 더 빠른 길이든 돌아가는 길이든 본인이 스스로 느끼면서 걸어갔으면 좋겠어요.” (박민성)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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