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법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소송을 낸 일본 기업(미쓰비시중공업·일본제철)의 참여 없이 포스코 등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수혜 기업의 출연금을 모아 2018년 대법원 확정판결로 승소한 강제징용 피해자 15명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는 내용이 담길 예정이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선 징용 문제를 서둘러 매듭지어야 한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정부는 징용 해법 발표 후 일본과의 조율을 거쳐 3월 중순 윤 대통령의 일본 방문 및 한·일 정상회담을 추진할 계획이다.
정부 고위 소식통은 “다음 주 초, 이르면 월요일(6일) 강제징용 문제의 해법을 발표할 예정”이라며 “지금까지 양국이 합의에 이른 내용을 우선 발표해 이를 신속하게 이행하고, 일본 측 피고 기업의 자발적 기부 참여 등 아직 해소되지 않은 쟁점에 대해선 해법 발표 이후 일본과의 협의를 이어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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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기업 참여 없이 '개문발차' 해법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일 3.1절 기념사를 통해 일본과의 미래지향적 협력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부는 강제징용 해법을 발표하고 한일 셔틀외교를 복원하며 올 상반기 내에 한일 관계 정상화 작업에 마침표를 찍겠다는 입장이다. [사진제공=대통령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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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중앙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정부가 발표할 강제징용 해법은 ‘개문발차(開門發車·문이 열린 상태로 차가 출발)’로 요약된다. 우선 한국 측이 단독으로 재원을 마련해 제3자 변제안을 추진하되, 해법 발표 이후 언제라도 일본 측 피고 기업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또 다른 쟁점인 사과 문제의 경우 한국 정부의 해법 발표에 맞춰 일본 측이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계승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합의가 이뤄졌다.
정부가 개문발차식 해법을 실행할 경우 돈의 출처와 관계없이 빠른 배상을 원하는 일부 징용 피해자의 요구사항은 해결된다. 하지만 양금덕 할머니 등 일본 측 피고 기업의 배상 참여를 필수 조건으로 요구했던 피해자의 시선에선 ‘반쪽 해법’이 될 수밖에 없다. 정부가 그간 일본과의 협상 과정에서 “정치적 결단”“성의 있는 호응조치” 등의 표현을 사용해 일본 측 피고 기업의 참여를 지속적으로 요청해 온 이유다.
강제징용 협상의 핵심 쟁점인 일본 피고 기업의 참여 문제는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한국 정부가 해법을 발표하는 모양새다. 일본은 협상 초기부터 줄곧 일본 피고 기업 참여에 대해 '절대불가' 입장을 고수했다. 사진은 2018년 11월 대법원 판결을 통해 최종 승소한 이후 기자회견에 나선 강제징용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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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본은 피고 기업의 참여에 대해선 초지일관 ‘절대 불가’ 입장을 고수했다. 한·일 양국은 지난달 26일 인천에서 해법 발표를 앞둔 비공개 고위급 협의를 개최했는데, 이 자리에서도 일본 측은 재차 피고 기업의 참여 문제에 대해 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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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법 발표 후 3월 '셔틀외교' 시동
대통령실은 징용 해법 발표 이후 이르면 이달 중순 윤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한·일 정상회담을 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양국 최대 현안인 강제징용 문제를 해결하고 셔틀 외교를 복원함으로써 올 상반기 내에 한·일 관계 정상화 작업에 마침표를 찍겠다는 계획이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28일 서울지방변호사회관에서 강제징용 피해자 및 유족과 면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일본과의 협상 경과를 포함한 강제징용 해법에 대해 설명하고 피해자들의 요구 사항을 수렴했다. 외교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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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기부터 한·일 관계 개선 의지를 강조하며 그 선결 조건으로 강제징용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지난해 7월 강제징용 문제를 둘러싼 각계 의견 수렴차 민관협의회를 출범했고, 지난 1월엔 공개 토론회를, 지난달 28일엔 확정판결 피해자의 유족들과 집단 면담을 개최했다.
그 과정에서 한·일 국장급 협의 등 실무선에서 징용 해법의 구성요건을 둘러싼 의견 교환을 지속했다. 지난달엔 급을 올려 한·일 외교장관·차관이 연쇄적으로 대면 회담을 갖고 쟁점 해소를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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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호응 없이 부담 떠안아"
정부가 발표할 강제징용 해법인 제3자 변제안은 한국 정부가 주도로 추진됐다. 배상에 참여하는 문제에 있어선 일본 피고 기업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사과 역시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계승한다는 '우회 사과'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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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이라는 목표에 매몰돼 협상의 주도권을 일본 측에 빼앗겼다는 점이다. 정부는 협상 초기부터 2018년 대법원 판결을 우회해 제3자가 일본 기업이 내야 할 배상금을 대신 지급하는 방안을 사실상 공식화했다.
이후엔 한·일 청구권 협정의 수혜를 입은 포스코가 2012년 약속했던 100억원의 기부금 중 잔여금인 40억원을 재원 마련 카드로 꺼내 들었다. 사죄 문제 역시 “(일본 정부가)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포괄적으로 계승할 경우 그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박진 외교부 장관, 지난달 15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며 합의의 문턱을 스스로 낮췄다.
외교 소식통은 “정부의 강력한 한·일 관계 개선 의지가 협상 국면에선 문제 해결에 대한 조급함으로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일본의 호응을 얻어내기보단 한국이 대부분의 부담을 떠안는 형태로 논의가 진전됐다”며 “일본 측에선 한국이 피고 기업의 기부를 요청하는 것 자체를 ‘자발성’이란 대원칙을 허무는 요구로 해석했고, 나아가 일본 측이 대법원 판결을 이행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며 거부감을 가졌다”고 말했다.
'속도 조절론' 밀어낸 尹 의지
박진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19일 독일 뮌헨에서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과 회담을 갖고 강제징용 해법 도출을 위한 막판 협의를 가졌다. 외교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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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 과정이 한국 측에 불리하게 전개됨에 따라 최근 1~2개월 사이엔 정부와 대통령실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일본의 3월 예산 심의와 4월 통일지방선거 및 중의원 보궐선거 이후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정치적 부담을 덜어낸 상황에서 협상을 재개하자는 제언도 잇따랐다.
특히 최근 한·일 관계를 담당하는 정부 고위급 인사가 윤 대통령에게 ‘속도조절론’을 강조하는 편지를 직접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재차 한·일 관계 개선 의지를 강조하자 정부 고위급 인사와 대통령실 참모들의 제언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일각에선 윤 대통령의 해법 발표 의지를 3~5월 추진 중인 정상외교 일정과 연관 짓는 분석도 나온다. 윤 대통령이 이달 일본을 방문해 한·일 셔틀외교를 복원하고, 다음달 미국 방문 및 5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의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강제징용 문제를 어떤 형태로든 해결하고자 한다는 의미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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