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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이슈 강제징용 피해자와 소송

100세 징용피해자 “일본엔 화나지만…국가발전 위해 화해, 어쩔 도리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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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안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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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생각하면 화가 나지만 이제 우짜겠능교.”

정부가 일제 징용 피해자 배상을 ‘제3자 변제’ 방식으로 추진키로 한 데 대해 울산 지역 징용 피해자 중 한 명인 안봉상(100)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20일 울산에서 만난 그는 “(일본 정부의 과거 잘못을) 떠올리면 아직 화가 나지만 대통령이 국가 발전을 위해 거기(일본)와 화해 분위기를 만든다는 것이니,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1923년 태어난 그는 강제동원 당시 힘겨웠던 순간을 또렷이 기억했다. 안 할아버지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21세 때인 1944년 일본으로 갔다. 어느 날 면사무소에서 갑자기 오라고 해서 갔던 게 출발이었다. 이어 차를 타고 울산역으로 이동한 다음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떠났다. 그러곤 배로 옮겨 탔고, 반나절쯤 지나 배에서 내려보니 일본 오사카(大阪)에 있는 한 조선소였다. 조선소에는 다다미방이 여러 개 있는 숙소가 있었다. 그곳엔 안 할아버지처럼 한국에서 끌려온 젊은 인부 수천 명이 머물고 있었다. 17명이 좁은 다다미방 하나를 같이 썼다. 2~3명이 한 조를 이뤄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배 만드는 일에 투입됐다. 군함을 한 달에 한 척씩 만들어내야 했다. 그는 “무엇보다 늘 배가 고팠다”고 기억했다. 조선소 식사는 성인 손 한 뼘 크기 나무 도시락에 담겨 나오는 고구마 섞은 밥이나 콩밥, 옥수수 주먹밥뿐이었다. 일당도 아주 적었다.

일본인의 몽둥이질도 무서웠다.

해방이 다가올 때쯤엔 원자폭탄 투하 위협을 느꼈다. 그는 “어느 날 오사카 전역에 비행기가 오가면서 전단을 뿌렸는데, 그걸 주워서 보니 한글로 ‘폭탄이 투하되니, 한국 사람은 피하라’는 내용이었다”고 했다. 이에 그는 동료들과 땅굴로 들어가 밤을 지새웠다.

이렇게 1년여간 고초를 겪으며 일했지만 1945년 해방 후 빈손으로 돌아왔다. 목선을 빌려 타고 후쿠오카·규슈 등을 거쳐 귀국하면서 모아둔 돈을 뱃값 등으로 모두 써버린 것이다.

안 할아버지 아들은 “80여 년 전 아버지가 강제동원 피해를 보셨지만 이와 관련해 어떤 보상도, 보훈 혜택도, 일본 정부로부터 사과도 받지 못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울산=김윤호 기자 youkno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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