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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이슈 미술의 세계

전란 넘어 한국 첫 상업갤러리 태동…‘천일화랑’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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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백화점에 들어섰던 미술상설진열관 천일화랑

전란 때 사망한 천재화가 이인성 등 첫 전시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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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천일백화점 옥상에서 열린 천일화랑의 유작 3인전 개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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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혁명이 촉발된 요인 가운데 하나는 정치깡패의 난동이었다. 임화수, 유지광 등 당시 서울 동대문 상권을 주름잡던 깡패들이 그해 4월18일 저녁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학교로 돌아가던 고대생 시위대를 갈고리와 곤봉, 각목으로 습격해 민심의 분노를 불붙인 사건은 유명하다. 당시 사건이 벌어진 도심 공간은 천일백화점이란 당대 유명한 백화점이 있던 큰 거리였다. 서울 종로 4가와 청계천 사이 예지동 길가에 있다가 70년대 사라진 이 건물 자리에는 천일라사라는 양복점만이 과거의 명맥을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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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석이 디자인한 1954년 9월 유작 3인 전 전시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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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천일백화점은 한국 정치사뿐만 아니라 한국현대미술사에서도 선구적 공간이었다. 미술판에서도 아는 이가 드물지만,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7월 전후 최초로 상업갤러리가 태동한 곳이 바로 이 백화점 안의 미술상설진열관, 곧 천일화랑이었다. 한홍택과 더불어 한국 산업디자인계의 1세대 작가로서 이땅의 디자인문화를 일구는데 선구자가 된 이완석(1915~1969)이 심혈을 기울여 건립한 천일화랑이 1954년 9월12~20일 열었던 기념비적 전시인 ‘유작 삼인 전’의 당시 기억들을 사진과 자료 등의 아카이브로 복원한 전시회가 최근 막을 올렸다.

지난 5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예화랑에서 개막한 기획전 ‘밤하늘의 별이 되어’는 역사적 의미가 예사롭지 않은 전시 마당이다. 전시의 주인공은 화랑 대표 김방은씨의 외조부인 이완석. 전후 한국에서 처음 등장한 상업화랑은 분명히 천일화랑이라는 사실을 운영주이자 한국 산업디자인 개척자인 이완석의 숨은 아카이브자료와 출품했던 두 명의 작가 이인성·구본웅의 작품들을 통해 일러주는 보기드문 미술사 발굴 비화 전시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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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도쿄 일본 민예관을 방문해 입구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이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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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동 가로수길 도로가의 예화랑 1층 전시장에서 69년전 유작전의 출품작가 이인성의 풍경화 소품과 구본웅의 인물 데생화를 만나면서 시작되는 이 전시는 예화랑이 전시한 한국 근현대 주요작가 21명의 작품을 선보이는 공간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실제 핵심은 3층에 있는 사진과 포스터, 글씨 등의 이완석 관련 아카이브 자료들이다. 1954년 9월12일 세 작가에 대한 애도 자리를 겸한 전시가 천일백화점 옥상에서 개막했을 때 추도식의 정경과 작가들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는 당대 주요 작가들의 생생한 모습을 담은 9장의 사진은 특히 주목되는 사료들이다. 1950년대 한국화단의 원로였던 최초의 양화가 춘곡 고희동이 추도사를 발표하는 모습과 그 옆에 침울한 모습으로 앉은 한국화 대가 청전 이상범, 함께 참석한 김환기, 이마동 등 한국 근현대 회화의 등뼈를 만든 이들의 모습이 생생한 스냅사진처럼 눈에 와 감긴다. 조선화단의 천재로 꼽혔으나 한국전쟁 때 오발 사고로 어이없이 세상을 등진 이인성의 아들 이채원씨가 어릴 적부터 고이 소장하고 있던 사진들로 이번 전시를 위해 예화랑 쪽에 특별히 건네어 공개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사진들 묶음 속에는 10살도 안된 아이 시절의 이채원 회장이 고인의 그림 앞에 서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채원 이인성기념사업회 회장은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였는데 내 앞으로 화분이 떨어져 옆의 어른들이 당황해하며 치워주었던 기억이 난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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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민예품으로 가득한 자신의 작업실에 앉아있는 생전의 이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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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화랑의 창립자 이완석은 1915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 일본 도쿄 태평양미술학교에서 디자인을 수학한 뒤 돌아와 1937년부터 조고약으로 유명했던 천일제약의 다양한 약 제품에 관한 디자인을 맡았다. 무궁화 문양을 상표에 넣은 그의 각종 약 디자인은 천일제약의 성가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고, 디자이너를 넘어 천일백화점 경영을 위임받는 ‘지배인’역할까지 맡게 된다. 평소 디자인 외에도 화단 작가들과 교분이 두터웠던 그는 1954년에 백화점 안에 본격적인 상업전시 영업과 기획을 표방한 ‘천일화랑’을 열었고 당대 주요 작가들의 집단 기획전으로 개관전을 연 뒤 잊혀져가던 이인성, 구본웅, 김중현의 굴러다니던 유작들을 처음 전시장에 내걸면서 재평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조선 도자기와 소반 등의 민예품 발굴에 기여하고 1931년 한국에서 타계한 일본 지식인 아사카와 다쿠미의 무덤도 1964년 일본 명인 카토 쇼린진의 방한을 계기로 찾아내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화랑 외에도 1964년 한국민예품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한국 미술의 저변 확대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벌였던 그는 1969년 지병으로 돌연 타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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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예화랑에서 열린 전시 개막 간담회에서 1954년 3인유작전의 작가 김중현의 딸 김명성(78)씨와 구본웅의 둘째·세째 아들인 구상모(86), 구순모(78)씨가 전시 당시 찍은 사진들 앞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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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예화랑에서 열린 전시 설명회장에는 김중현의 딸 김명성(78)씨와 구본웅의 둘째∙셋째 아들 상모(86)∙순모(78)씨가 나와 고인과 이완석에 얽힌 기억들을 되새기며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구본웅의 둘째 아들 상모씨는 “집과 친지의 집 곳곳에 먼지를 덮어쓰고 방치됐던 부친의 작품들이 처음 관객들에게 공개되면서 다시 조명을 받고 미술사의 기록에 남을 수 있었다”고 느꺼워 했다.

“2년전 한 지방재단으로부터 외조부의 포스터 작품을 확인하는 전화를 받으면서 고인의 행적을 찾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 한국 현대미술사의 뿌리 찾기로 확대됐어요. 69년 전 출품작들은 공공미술관에 들어가거나 다른 소장자로 넘어가 한점도 나오지 않았지만, 당시 천일화랑의 실체와 전시 의미를 공유할 수 있어 기쁩니다.” 김방은 화랑 대표가 말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예화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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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천일백화점 옥상에서 열린 천일화랑의 유작 3인전 개막식. 화단 원로 고희동이 추념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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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한국 전통미술의 애호가였던 아사카와 다쿠미의 망우리 무덤을 찾으러 한국에 온 가토 쇼린진(오른쪽에서 세번째)과 함께 무덤 앞에서 사진을 찍은 이완석(오른쪽에서 두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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