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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칼럼]우리 언어생활은 건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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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정재숙 전 문화재청장


[정재숙 전 문화재청장] 독창적 문학세계를 구축한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를 흠모한 나머지 필명을 에도가와 란포라 지었던 일본 추리 소설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천국에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영어일 것이다.’ 입 안을 유연하게 휘감는 영어의 느낌을 떠올려보면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하다.

서양인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일본말을 나긋나긋하고 섬세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받침 없이 모음자만으로 이어지는 일본어는 바로 그런 이유로 여성적이며 부드러운 감각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한국말은 이방인의 귀에 어떻게 들릴까. 가끔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우리말에서 뜻을 제거하고 소리로만 들어보려 하지만 그 실험에 성공해본 적은 없다. 언어의 의미 차원은 워낙 압도적이어서 우리말을 생경한 외국어 듣듯 하기는 힘든 일이다. 한국어가 영어나 일본어와 비교해 음향의 측면에서 어떤지는 짐작하기도 쉽지 않다.

K-팝과 K-드라마에 힘입어 세계 각지에서 한국어 배우기 열풍이 일어난 지도 꽤 됐다. 유명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 장에서 외국 청소년들이 한국어로 떼 창을 쏟아내는 모습은 요즘 흔한 풍경이다. 최근에는 한국말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외국인들도 늘어났다.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닌 것 같지만 새삼 우리말을 잘 쓰고 가꾸어야겠다는 마음을 품게 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썼다. 그도 모자라 ‘세계사에 희귀한’ 따위의 과장된 수식어까지 붙였다. 이제는 피를 나눈 단일민족이라는 허구에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 그보다는 언어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감정을 지니게 된다.

외국인들이 구사하는 한국어를 관찰해 보면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영원히 서투른 한국어를 쓰는 이방인들이다. 꽤 오랜 시간을 한국에서 지내도 그들의 한국어는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한국에 동화되지 않은 외국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뻔히 한국어를 알면서도 일부러 영어로 말해서 한국사람 기죽이는 일을 즐기는 일부 백인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둘째는 모든 종결어미를 ‘요’로 끝내는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다문화가족은 체류기간이 짧아도 꽤 이르게 한국어를 익힌다. 생존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워낙 속성으로 익힌 탓인지 대체로 단문이고 ‘요’로 마무리한다.

셋째는 한국사람 뺨치게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인들이다. 무결점 한국어로 옮아가는 비결 가운데 하나는 우리말 특유의 평탄한 억양에 익숙해지는 일이다. 외국인의 입에서 이런 한국어를 듣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진 않은 것 같다. 국력의 신장과 더불어 한국 대중문화가 세계로 발신된 덕분이다.

한국어에는 우리가 호흡하듯 쓰는 사이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몇 가지 불편하고 좋지 않은 특성이 있다. 일본어도 마찬가지지만 길고 긴 말의 끄트머리에 가서야 긍정인지 부정인지가 드러난다. 자칫 기회주의적인 언어라는 지적을 받을 만하다. 분위기를 봐가며 말꼬리를 슬쩍 돌리거나 말머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선회하는 언어습관을 지닌 이들을 종종 볼 수 있는 까닭이다.

그에 못지않게 큰 특징이 주어가 탈락된다는 점이다. 우리말은 주어를 착실히 붙이면 아주 어색해진다. 그래서 입말이든 글말이든 흔히 주어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명심할 점은, 그렇다고 해서 주객이 전도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말의 이런 특성으로 인해 최근 큰 사회적 쟁점이 됐던 몇몇 경우를 보면 국민을 혼란과 분열로 몰아가는 한복판에 대통령이 한 말이 있다. 공인(公人)은 기본적으로 한국어를 정확히 구사하는 책임감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떠오른다. 어찌됐든 우리말의 오용과 오독에 관련한 공격과 해명을 보노라면 정치인들은 일상 언어의 취약한 부분을 활용하는데도 역시 능란하구나 싶어 쓴 웃음을 짓게 된다.

한민족임을 증거 하는 언어 공유의 영역까지 사회적인 동의가 흔들리게 된 나라, 그것은 아마도 끝없는 고통의 공동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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