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민노총의 불침번? - 지난 16일 밤 민주노총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서울 중구 덕수궁 돌담길 앞 인도를 점령한 채 노숙 시위에 들어가자, 경찰이 줄지어 조합원들 앞에 서 있다. 경찰은 이날 밤새 시민들의 통행로를 확보하는 한편 조합원들과의 충돌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조인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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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조선일보 8면 사진은 불법 앞에 무기력한 경찰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16일 서울 덕수궁 돌담길 인도에 돗자리를 깔고 드러누워 노숙 시위를 벌인 민노총 건설노조원들 앞에 경찰이 줄지어 선 모습이다. “통행로 확보 차원”이라고 했지만 마치 경찰이 노조원들 노숙에 불침번을 서는 듯했다. 경찰이 이날 오후 5시 이후의 집회는 불허했기 때문에 밤샘 노숙은 그 자체로 불법이다. 그런데 경찰이 그냥 지켜보기만 한 것이다. 도심 한복판에서 이런 불법이 경찰의 완전 방관 아래 벌어지는 나라는 적어도 선진국 중엔 없을 것이다.
밤샘 노숙 시위 과정에서 노조원들이 벌인 행태는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술판을 벌이고 쓰레기를 투기하고 노상 방뇨까지 했다. 모두 법규 위반이다. 그러나 어느 경찰관도 이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미국은 집회 참가자들이 미리 허가받은 범위를 벗어나거나 현장의 경찰 지시에 불복하면 강력하게 진압한다. 무서울 정도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현장에서 바로 체포한다. 이 때문에 미국 시위자들이 가장 중시하는 시위 가이드라인이 “경찰 지시에 따르라”이다. 반면 민노총은 16일 경찰의 해산 명령에 코웃음을 쳤다. 경찰이 법을 집행할 의지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경찰이 이 지경까지 된 데는 문재인 정권이 경찰 공권력을 무력화한 영향이 크다. 문 정부가 만든 경찰개혁위원회는 ‘사소한 불법을 이유로 시위를 막지 말라’ ‘경찰이 피해를 입어도 시위대를 상대로 한 소송은 자제하라’는 내용을 권고했고, 경찰이 이를 받아들였다. 쌍용차 불법 점거 등 유죄가 확정된 시위대를 정부가 연이어 사면하고 불법 시위를 막은 경찰은 징계와 처벌을 받는 황당한 일도 벌어졌다. 문 정부는 제주 강정마을 시위와 관련해 박근혜 정부가 시위대에 청구했던 구상금 34억원도 포기했다. 불법이 인정받고 법 집행이 처벌받는 이런 상황에서 어느 경찰관이 불법 시위를 막겠다고 나서겠나. 윤석열 정부는 불법 시위 엄단 방침을 여러 차례 밝혔다. 하지만 달라졌다고 느끼는 국민은 별로 없다. 경찰은 여전히 불법 시위대 앞에서 눈치만 보고 있다. 법 집행을 했다가 정권이 바뀌면 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법 집회·시위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엄정한 법 집행밖에 없다. 작년 말 화물연대가 불법 파업을 철회한 것도 정부가 업무개시 명령을 내리고 운송 방해 행위를 신속하게 사법 처리하는 등 원칙 대응을 했기 때문이다. 이번 민노총 불법 집회를 계기로 정부 차원에서 불법은 절대 수용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원칙을 다시 세워야 한다. 경찰도 국민을 믿고 법을 집행해야 한다. 반발이 있을 것이고, 각종 사고를 유도하려는 시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법과 원칙을 양보하면 악순환만 낳을 뿐이다. 법은 최후의 보루이고, 최후의 보루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져야 한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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