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20대 국악인 차다율 씨 (하)
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
국악인 차다율 씨는 중앙대 전통예술학부를 졸업한 뒤 국악과는 관련 없는 연예기획사와 크루즈 여객선 등에서 일하기도 했다. 2018년 크루즈 여객선 승무원으로 일할 당시 모습. 사진제공 차다율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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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편(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30519/119386103/1)에서 이어집니다.
“한결같은 동작으로 씨앗을 뿌리고 있는 파종꾼들이 평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쪽에는 주검이 있다면, 다른 쪽에는 씨앗이 뿌려지고 있는, 바로 그 대지 위에서 빵이 자라나고 있었다.”(에밀 졸라의 ‘대지’에서)
국가무형문화재 ‘발탈(발에 가면을 씌워 연희하는 탈놀이)’ 전수자인 차다율 씨(29)는 평소에 만난다면 국악인이란 사실을 알아보기 어렵다. 실제로 현재 문화재청 산하 한국문화재재단 한국무형문화재진흥센터 전승기획팀에서 일하고 있어, 여느 여성 직장인과 다를 바가 없다.
그가 겪어낸 20대 사회생활도 그랬다. 국악을 전공했지만 연예기획사와 크루즈여행사 등을 다니며 사회생활의 부침을 감내해야 했다. 초봉으로 월급 70만 원을 받으며 야근에 시달려야 했고, 크루즈에선 상사와의 갈등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는 이제 다시 국악으로 돌아와 “그 모든 과정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되기 위한 고마운 밑거름이 됐다”고 당차게 얘기한다. 다율 씨에게 국악은 어떤 의미일까.
차다율 씨는 크루즈 승무원 시절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 중 하나로 기억한다. 젊은 직장인에게 상사의 모진 괴롭힘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사진제공 차다율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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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즈 승무원 생활이 쉽지 않았나 보네요.
“음…, 배라는 환경 자체가 주는 어려움이 있었던 거 같아요. 배 타는 동안엔 퇴근도 따로 없이 갇힌 공간에서 생활하잖아요. 그렇다 보니 그곳만의 엄격한 규칙 같은 게 있어요. 6일 근무 체제라 하루 쉬고 다시 배로 돌아가니 친구하고 약속 한번 잡기도 어려웠고요. 처음엔 배를 탄다는 게 너무 매력적이었는데, 갈수록 답답함이 커졌죠.”
-1년 만에 관둔 것도 그 때문이었군요.
“네, 사실 관둔 시점이 후회되긴 해요. 한두 달만 더 있으면 상여금이랑 성과급 같은 게 나올 예정이었거든요. 월급까지 합치면 1000만 원이 넘어서 제겐 엄청나게 큰돈이었는데…. 하루하루 숨쉬기도 어렵다 보니 그때까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요. 배에 타면 매일 울고 있으니 이러다 무슨 일 생기겠다 싶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최를 기념해 열린 ‘희망다리문화토크콘서트’ 공연 무대. 사진제공 차다율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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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보다 건강이 중요하죠.
“그래도 시간이 지난 뒤엔 ‘조금만 더 버틸걸’하고 후회하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하니까 더 아깝네요. 그 고생을 했는데 그걸 못 받고, 하하. 관두고 좀 쉬면서 마음도 추스르고 여행도 다니고 그랬어요. 많이 지쳤는지 꽤 오래 쉬었거든요. 대학 다닐 때도 알바를 계속해서 그렇게 쉬어본 적이 없어요. 그때가 가장 긴 방황의 시간이었어요. 2019년에 배에서 내렸는데, 2021년에 한국문화재재단에 들어왔으니까. 중간에 물류회사 같은 데도 조금씩 다녔지만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던 거죠.”
“그럼요. 너무 좋았죠. 근데 실은…, 입사 직전에 고민이 없진 않았어요. 그때 한 무역회사도 같이 붙었거든요. 그쪽이 연봉은 800 정도 높았어요. 일은 당연히 재단이 맘에 드는데, 처음엔 계약직이기도 했고. 그래서 한 가지만 생각했어요.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뭘까. 그렇게 생각해보니, 자꾸 다른 길로 돌지 말고 기회가 닿았을 때 어떻게든 다시 국악 쪽으로 돌아와 인연을 쌓자 싶어서 마음을 굳혔죠.”
-국악에 대한 애정이 크지만, 돈을 벌고 싶단 의지도 강해 보여요.
“네, 말씀하셨듯이 직장인한테 연봉은 큰 문제니까요. 그리고…, 가만 생각해보니 경제적 자립에 대한 강박 비슷한 게 있긴 한가 봐요. 무슨 엄청난 부자가 되겠다는 건 아니에요. 아무래도 엄마가 고생하시면서 저랑 언니를 키우셨으니까, 의젓하게 제 몫을 하고 싶고 가사에 보탬도 되고 싶죠.”
-혹시 아버님이….
“네, 제가 열두 살 때 돌아가셨어요. 원래 건강이 좀 안 좋긴 하셨는데, 집에 계시다 쓰러지셔서…. 그때 가족이 다 집에 있을 때였는데, 손 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떠나셨어요.”
차다율 씨가 2019년 인도네시아 발리에 있는 바투르산 일출 트레킹을 갔을 때. 사진제공 차다율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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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였는데 충격이 컸겠네요.
“그땐 뭐가 뭔지 상황 파악도 잘 안됐어요. 엄마가 저희는 당장 방에 들어가 있어라 그러고, 구급차 부르고 혼자 알아서 다 대처하셨어요. 전 그냥 현실 같지가 않아서 계속 멍했던 거 같아요. 항상 그랬어요. 엄마는 언니랑 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면서 모든 일을 해내셨어요. 아빠 돌아가시고 집안 형편도 안 좋아졌지만, 식당에서 힘들게 일하시면서도 저희를 다 건사하셨죠. 그런데도 어디 가서 기죽지 말라며 최신 스마트폰 나오면 사주려고 하시고. 솔직히 풍족하진 않았지만, 뭐가 부족하거나 아쉬운 적은 없었어요.”
“그러니까요. 아시겠지만, 예술 분야라는 게 돈이 보통 많이 드는 게 아니잖아요. 대학을 졸업해도 금방 돈벌이가 되는 게 아니고. 그런데도 엄마는 언제나 절 응원하고 뭐라도 하나 더 도움을 주려고 애쓰셨어요. 딸이 자신과 같은 길을 걷는 게 대견하기도 하셨겠지만, 그보다 자식이 하고픈 일을 하길 바라셨던 거 같아요. 그렇지만 저도 엄마만 바라보고 있을 순 없으니까. 대학 때 열심히 아르바이트했고, 졸업하고도 열심히 벌려고 했던 거죠.”
-재단에 들어온 뒤 발탈 전수자도 됐어요.
“제가 그래도 인복은 있는 편인가 봐요. 재단의 김광희 문화상품실장님이 절 뽑은 면접관이신데, 국가무형문화재 발탈 전승교육사시거든요. 뽑아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제가 민요 전공이란 걸 아시고는 유심히 지켜보시더니, 어느 날 발탈 전수자 과정을 제안하셨어요. 회사에선 높은 상사이신데, 제자로 거둬주시겠다고 먼저 말씀해주시니 저로선 너무 감사할 따름이죠.”
지난해 11월 부산 중구 용두산공원에서 열린 발탈 공연에 참여한 모습. 사진제공 차다율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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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탈이란 게 민요하고는 좀 다르지 않나요.
“그렇죠. 전 경기민요를 했던 사람인데, 발탈은 남도의 판소리가 베이스니까요. 목을 쓰는 법도 다르고,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도 다르죠. 그래서 처음엔 고민도 많았어요. 그런데 스승님(김 실장)이 ‘너무 얽매이지 말고 너만의 방식으로 표현해라’고 하셨어요. 발탈은 아시다시피 문화재청이 지정한 전승취약종목이기도 해요. 그만큼 이를 이어가고 발전, 활성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전통예술이죠. 저로서는 새롭게 배우는 재미도 있고, 이제야 제대로 길을 걸을 수 있으니 감사하고 행복하죠.”
-그 와중에 대학원도 다닌다면서요.
“네, 올해부터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국제문화유산협동과정에 등록했어요. 사실 이것도 스승님이 권유하신 거였어요. 사람은 계속 공부해야 한다면서. 스승님이 워낙 열정적이고 부지런하시거든요. 재단에서 일하시면서 발탈 전승교육사에 오르시고 고려대에서 박사학위까지 따시고…. 사람이 성실하게 산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몸소 보여주고 계시니, 저도 게으름 피울 수가 없죠.”
“하하, 맞아요. 조금은 돌아왔지만, 결국 국악은 제가 걸어야 할 길이란 믿음은 항상 간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걸 잘 실천하고 계신 분을 만났으니, 다시 놓칠 수 없는 기회를 잡은 셈이죠. 저 역시 항상 성장하는 사람이 되는 게 인생의 목표거든요. 연예기획사 다닐 때 부사장님이 ‘성장하는 스스로를 느끼면 정말 재밌어’란 말씀을 해주셨어요. 일은 힘들었지만 그 말은 정말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어요. 아직은 미약하지만 하루하루 제가 크고 있단 생각을 하면 더 열심히 하게 되는 거죠.”
-국악의 어떤 점이 다율 씨를 이렇게 이끈 걸까요.
“뭐라고 해야 할까요…. 국악은 제게 어두운 밤바다에서 불빛을 비춰주는 등대 같아요. 힘들거나 헤매고 있을 때 여기에 빛이 있다며 버티고 있어 주는. 제가 대학도 가고, 좋아하는 일을 찾게 만들어줬죠. 평생 함께해야 할 소중한 존재.”
차다율 씨가 승무원 시절 편안한 복장으로 찍은 사진. 사진제공 차다율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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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 얘기를 들어보면, 그건 ‘어머니’와 동의어 같은데요.
“아…. 그러네요, 그러네요. 제게 너무나 감사한…. (울먹거리더니) 아, 저 왜 이러죠. 죄송해요. (잠시 숨을 고른 뒤) 민요는 정말 엄마 같네요. 매일매일 감사하고 지금의 절 있게 만들어준. 전 제가 되게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난 잘 될 거다, 난 잘 될 거야’라고 항상 믿거든요. 그 믿음의 뿌리가 어디서 나왔나 생각해보면, 그게 다 엄마에서 온 거 같아요.”
-어머니도 다율 씨가 잘 커 줘서 고마우실 거예요.
“아직 멀었지만, 전 항상 절 생각할 때 ‘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 그리고 도전을 멈추지 않는 사람. 그런 게 저 혼자서 가질 수 없는 마음이고 자세였던 거 같아요. 엄마가 주신 것 중에 그게 가장 큰 게 아닐까 싶네요.”
“제가 돈 벌려고도 노력해봤잖아요. 물론 큰돈을 벌진 못했지만, 결국 돈보다 삶의 가치가 중요하단 걸 배운 게 제일 큰 교훈이었어요. 국악도 그런 자세로 대하고 싶어요. 한때 주위 사람들 다 가진 ‘명품백’이 왜 저만 없을까 생각했던 적도 있어요. 하지만 이제 알 거 같아요. 전 그것보다 더 큰 걸 가졌다, 명품백보다 명품 사람이 돼야겠다. 그러면 오늘 하루를 알차게 살고, 내일은 더 노력해야겠죠? 이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다율아, 넌 내일 더 나은 사람이 될 거야’라고요.”
[나의 옛날이야기] ‘요즘 (젊은) 것들’은 연재 글마다 청년들이 직접 고른 옛 사진들을 싣고자 합니다.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며 그 시절을 들춰보는 ‘코너 속의 코너’입니다. 차다율 씨가 보내준 두 번째 사진은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지금의 다율 씨를 보며 어디선가 아버지가 흐뭇한 미소를 짓고 계실 것만 같네요. 사진제공 차다율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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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환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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