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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이희경의 한뼘 양생] 일삼아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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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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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어쩌다’였다. 2011년 1월6일 민주노총 지도위원 김진숙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35m 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고, 그해 7월 나와 친구들 몇명은 그 투쟁에 연대하는 ‘2차 희망버스’에 탑승했다. 그렇다고 대단한 대의명분을 갖고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미안한 마음에” “친구가 가자고 해서” “희망버스라는 방식이 신선해서” 어쩌다 동참하게 되었을 뿐이다.

경향신문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그런데 1년 후 우리는 또다시 삼성반도체 백혈병 유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또 하나의 약속>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하게 된다. 한 세미나 회원이 이 소식을 전했고, 어쩌면 무심히 넘길 수도 있는 이 문제를 몇몇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공론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삼성에 취직한 지 1년8개월 만에 급성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고 2007년 3월 사망한 당시 스물셋 황유미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려주었고, 삼성반도체 작업장의 현실을 폭로하는 <먼지 없는 방> 등을 읽고 토론하는 세미나를 열었다. 다음해 개봉된 영화 엔딩 크레디트 펀딩 명단에서 공동체 이름을 발견했을 때 매우 뿌듯했다. 지리멸렬한 삶에 작은 숨통이라고 틔우려고 시작한 공부였는데 진정한 구원은 내 삶 바깥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운명처럼’ 밀양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밀양에서는 2005년부터 정부와 한전의 일방적인 765kV 송전탑 건설 계획에 맞서 평생 살아온 땅과 집을 지키기 위한 주민들의 눈물겨운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밀양의 전쟁’으로 불렸던 그 일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급기야 2012년 1월16일 이치우 할아버지가 “내가 죽어야 이 문제가 해결되겠다”며 분신, 사망한다. 우리가 밀양에 처음 간 것도 그해 가을이었다.

밀양 투쟁은 2013년과 2014년에 가장 긴박했는데 이 시절 밀양은 멕시코의 사파티스타가 치아파스 라칸돈 정글에서 전 세계를 향해 메시지를 보냈듯이, 경상남도 끝자락에서 전국을 향해 끊임없이 메시지를 발신했다. 지난 방문으로 밀양 주민들과 이미 얼굴로 장소로 엮여버린 우리는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우리는 밀양의 부름에 기꺼이 응답했다.

그때부터 약 8년간 밀양 지지방문, 한전 항의방문, 밀양투쟁 홍보, 북 콘서트, 골목집회 조직, 76.5일간의 1인 릴레이 시위, 60주 동안 매주 1회 탈핵집회 참여 등을 포함해 우리는 220회가량 연대활동을 수행했다. 시위용품은 책만큼이나 늘어났고, 강의실은 종종 집회 상황실로 변했으며, 세미나 발제 대신 성명서를 쓰는, 말 그대로 ‘일삼아 연대’의 나날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질문도 깊어졌다. 우리는 왜 밀양에 가는가? 우리는 그곳 주민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고마운 연대자”들인가? 우리는 밀양에 도움을 주는 시혜자이고, 그분들은 도움을 받는 수혜자인가? 그렇다면 또다시 새로운 위계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점차 우리가 깨닫게 된 것은 밀양의 그 유명한 슬로건,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가 의미하는 것처럼 밀양과 우리는 보이지 않는 구조로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밀양이 우리 공부를 되돌아보게 하고, 우리 삶을 성찰하게 만들고, 우리를 변화시켰다. 우리를 키운 것의 팔 할은 밀양이었다.

그러나 밀양 투쟁은 이기지 못했다. ‘정당한 법을 집행한다’는 공권력이 주민들의 비폭력 저항을 폭력적으로 진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코로나19가 닥쳤다. 우리의 연대활동도 동면에 들어갔다. 잠자던 연대 세포를 깨운 것은 지난해부터 시작된 기후정의 집회와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투쟁이었다. 지난 4·14 기후정의 파업에도 공동체에서 많은 친구가 참여했다. 세종까지 가기 어려운 친구들도 각자 자가용 타지 않기, 물건 사지 않기, 하루 단식 등의 작은 실천을 통해 파업에 동참했다. 산티아고 대신 팽목항 바람길을 순례길 삼아 한 해에 한 번은 걸어보자는 제안에 따라 6월3일 팽목항에 가는 친구들도 있다. 우리는 전장연 투쟁에 두 달에 한 번은 참여하기로 했다.

신권위주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한다.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가 되어간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장애인, 노인, 가난한 사람들부터 벼랑 끝 삶으로 내몰린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나의 방법은 “일삼아 연대!” 정희진 작가의 말을 잠시 훔쳐 말하자면 “나쁜 사람한테 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삼아 연대!’가 필요하다. 거리에서 자주 만나자.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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