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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엉뚱한 주소에 소송서류 간 뒤 끝나버린 항소심...대법 "재판 다시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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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대법원 전경.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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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항소장에 잘못된 주소가 적혀 재판이 시작됐는지도 몰랐다면, 결국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해 항소도 취하한 것으로 간주됐다면 어떨까. 대법원은 이 사람에게 재판을 받을 기회를 한 번 더 줘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유치권을 두고 다투는 소송의 피고 A씨에 대해 패소 판결을 내린 원심판결을 파기해 환송한다고 4일 밝혔다.

한 농업회사법인에다 기계 설비를 투자한 뒤 매달 돈을 받기로 한 A씨는 약속된 돈이 들어오지 않자, 해당 업체 소유 부동산에 대한 경매절차에서 유치권을 신고했다. 그러자 지난 2021년 해당 업체는 “유치권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A씨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지난해 4월 1심 재판부인 창원지법 밀양지원 민사1부(부장 조현철)는 원고인 업체 손을 들어줬다. A씨와 업체 사이 맺은 투자 계약을 이유로 해당 부동산 인도청구권을 인정하기엔 관련성이 부족하다는 취지다. A씨는 항소했지만, 정작 재판에 나가보지도 못한 채 자신의 항소가 이미 취하됐다는 사실만을 뒤늦게 알게 됐다.

A씨는 부랴부랴 “나는 재판하는지도 몰랐으니 항소취하 효력이 없다”며 기일 지정을 신청했지만, 2심 재판부인 부산고법 창원민사2부(부장 김종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사소송법 제268조에 따르면 당사자가 두 번의 변론기일에 나오지 않고, 두 번째 기일로부터 1개월 이내에 기일지정신청도 하지 않았다면 재판부는 항소를 취하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A씨가 뒤늦게 기일지정을 신청한 때에는 항소가 취하된 날로부터 이미 2주나 지난 뒤였다. 항소장에 적힌 주소가 화근이었다.

앞서 A씨에게 소송을 낸 업체는 2021년 소장에다 A씨 주소를 실거주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썼다. 주소가 잘못돼 1심 때도 우편집배원이 두 차례 방문했는데도 A씨가 없어 소장이 송달되지 않았지만 A씨가 우체국을 찾아가서 소장을 찾아가 이후 재판은 무리없이 진행됐다. A씨가 변호사를 선임하면서 이후 재판 서류는 변호사 사무실로 송달됐기 때문이다.

문제는 항소심부터였다. A씨의 변호사가 항소장에다 1심 소장에 적힌 잘못된 주소를 그대로 쓴 것이다. 게다가 2심부터는 A씨가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아 재판 서류는 갈 곳을 잃게 됐다. 2심 법원은 해당 주소로 1차·2차 변론기일통지서를 보냈지만 송달이 되지 않았다.

A씨는 2심 재판부에 뒤늦게 기일 지정을 신청하면서, 법원의 송달 방식을 지적했다. 원칙적으로 송달은 집배원이나 집행관, 법원사무관 등이 직접 방문해 서류를 전달하는 방식(교부송달)으로 이뤄진다. 당사자가 없다면 대리인에게 송달하거나(보충송달), 당사자가 피할 경우 해당 장소에 놓고 가는(유치송달) 방법도 있다. 만일 모두 실패할 경우 법원은 서류를 등기우편으로 ‘발송송달’한다. 그리고 송달의 효력이 생긴 것으로 간주한다.

A씨 측은 “실제 생활하지도 않는 주소에 법원이 발송송달 방식으로 등기우편을 보내고 송달효력이 있다고 간주한 건 적법하지 않았다”고 했다. 민사소송법상 발송송달을 선택할 때는 ‘해당 주소가 송달받을 사람의 주소가 맞다’는 전제, 즉 송달장소의 적법성이 확보돼야 한다. 대법원 판례는 이 주소가 ‘맞느냐’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송달받을 사람의 생활근거지가 되는 주소·거소·영업소 등 소송서류를 받아 볼 가능성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 발송송달은 당사자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불가피할 때만 허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해당 주소가 적법한 송달 장소라고 봤다. 생활근거지가 되는 주소가 맞다고 인정한 것이다. 1심 재판이 시작될 때도 해당 주소로 소장이 송달됐지만 A씨가 우체국으로 가 송달을 받았던 점, A씨가 관련 유치권 신고서에 기재된 주소가 해당 주소와 같은 점, 항소장에도 이 주소가 쓰인 점 등을 들었다.

이 사건은 대법원으로 향했고, 유치권 존재 여부가 아닌 송달의 적법성이 상고심 쟁점이 됐다. 대법원은 A씨에게 한 번의 기회가 더 필요하다고 봤다. 해당 주소가 A씨의 생활근거지가 아니어서, 발송송달의 전제가 되는 ‘적법한 송달장소’라는 요건을 맞추지 못했다고 본 것이다. A씨를 상대로 소송을 낸 업체가 1심 재판 도중 증거로 제출한 투자약정계약서에는 A씨의 주소가 실거주지로 기재돼 있었다는 점도 증거가 됐다.

오효정 기자 oh.hyo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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