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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즐기면서 노래했다" 록가수 꿈꾸던 22세, 세계 3대 콩쿠르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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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회 성악 부문 최초의 아시아 남성 우승자

한국인으론 지난해 최하영 이어 다섯번째 우승

"전세계 돌아다니며 오페라 무대에 서고 싶어"

중앙일보

2023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한 바리톤 김태한(가운데)이 2,3위 수상자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대회 역사상 성악 부문 최초의 아시아 남성 우승자가 됐다. 사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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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새벽(현지시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시상식이 열린 벨기에 브뤼셀의 콘서트홀 팔레 데 보자르. 심사위원장 베르나르트 포크롤이 “태한 킴!(김태한)”을 호명하자, 객석에 있던 김학재 주벨기에 유럽연합대사관 공사 겸 총영사, 주벨기에 유럽연합한국문화원 김재환 원장 등 한국 관계자 뿐 아니라 많은 벨기에 청중들이 환호와 갈채를 보냈다.

‘한국 클래식 음악의 수수께끼’, ‘파이널리스트’ 등 K클래식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티에리 로로는 “다섯 번째!”라는 한국말로 축하를 건넸다. 홍혜란(2011, 성악), 황수미(2014, 성악), 임지영(2015, 바이올린), 최하영(2022, 첼로)에 이어 김태한이 다섯 번째 우승자란 의미였다.

'성악계 샛별' 김태한(22·바리톤)이 2023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쇼팽 피아노 콩쿠르, 차이콥스키 콩쿠르와 함께 세계 3대 음악 경연대회로 꼽히는 이 대회는 바이올린·피아노·첼로·성악 부문이 매해 번갈아가며 열린다. 작년 첼로 부문 최하영이 우승한 데 이어 한국인이 2년 연속 정상에 올랐다. 대회 역사상 성악 부문 최초의 아시아 남성 우승자로도 기록됐다.

2위는 미국의 콘트랄토 재스민 화이트(30), 3위는 러시아·독일 2중 국적의 소프라노 율리아 무치첸코(29)가 수상했다. 베이스 정인호(32)는 5위에 입상했고, 바리톤 권경민은 결선 진출자로 기록됐다.

김태한은 1위 상금 2만5000 유로(약 3500만원)을 받는다. 2위까지 해당하는 군 면제 혜택의 수혜자가 됐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김태한은 독일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 진학할 예정이다. 바리톤 나건용을 4년간 사사하고 지금은 국립오페라단 스튜디오에서 소프라노 김영미에게 배우고 있는 김태한의 이번 우승은 ‘메이드 인 코리아’ 음악교육 만으로 거둔 성과다.

김태한은 2021년 한국성악가협회 국제성악콩쿠르와 중앙음악콩쿠르에서 2위를 수상했다. 작년 독일 노이에 슈팀멘 콩쿠르 결선에 진출했고, 서울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금호영 아티스트콘서트로 데뷔했다.

세계적인 무대에서 긴장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김태한은 "남을 잘 의식하지 않는 게 내 장점"이라며 "즐기면서 노래했다. 국제 콩쿠르보다 국내 콩쿠르가 더 떨린다"고 했다. 이어 “국내 콩쿠르는 1등 할 자신이 없을 정도로 천재적인 실력자들이 많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김태한은 12명이 겨루는 결선 무대를 준비하며 “낭만적인 곡들로 레퍼토리를 구성했다. 최선을 다해 감정을 전달하는 데 집중했다”고 했다. 결선 무대에선 영리한 전략이 돋보였다. 균형적이고 모범적인 가창이 주효했다.

“피아노 반주와 노래할 때는 과한 성악적 표현이 가능한데, 오케스트라 반주이다 보니 일단 제 소리가 들리려면 타협을 해야 했습니다. 과하게 표현하지 않도록 최대한 움직임도 절제하면서 노래했습니다. 선생님도 늘 그렇게 부르라고 하셨어요.”

라 모네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함께한 결선에서 김태한은 2부 첫 순서에 등장했다. 첫 곡으로 바그너 ‘탄호이저’ 중 ‘죽음의 예감처럼 황혼이 대지를 뒤덮고 - 저녁별의 노래’를 불렀다. 깔끔한 가창이었고, 호흡도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느낌이었다. 말러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중 ‘타는 듯한 단검으로’에서도 모범적인 가창으로 청중들에게 개운한 뒷맛을 남겼다. 코른골트 ‘죽음의 도시’ 중 ‘나의 갈망이여, 나의 망상이여’를 부를 땐, 감동으로 이어지는 연결선도 돋보였다.

끝곡인 베르디 ‘돈 카를로’ 중 로드리고의 아리아 ‘들어주시오 카를로 - 나에게 최후의 날이 왔소’ 역시 영리한 전략이 돋보였다. 이탈리아어가 아니라 오리지널인 프랑스어판으로 불렀다. 규격에 맞춘, 손에 잡힐 듯한 노래였지만 여기에서도 김태한의 전략이 주효했다.

“‘돈 카를로’는 베르디가 프랑스에서 의뢰받아 작곡한 프랑스어 버전이 오리지널입니다. 원어이기도 하고 마지막 가사가 ‘플랑드르를 구해주세요’란 뜻인데요. 이곳 벨기에가 플랑드르 지방이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탈리아어보다 프랑스어가 편했습니다.”

‘발음이 정확하다’란 호의적인 반응에 김태한은 “딕션을 굉장히 많이 중시하는 편”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네이티브 스피커들의 발음을 들으면서 따라하고 익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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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쿠르를 앞두고 하루에 몇 시간 연습했냐는 질문에 김태한은 “세 보지 않았다. 성악가는 놀면서도, 걸어다니면서도 연습할 수 있다”며 “다른 분들에겐 민폐가 되겠지만...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린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그동안 음악에 거의 잠긴 채 살았다”고 말했다.

김태한은 원래 록 가수를 지망했다. 중학교 때 밴드 활동을 했다. 이후 고전 성악에 매료돼 선화예고에 진학했다. “같은 전공을 하는 선후배 동료들과 서로 자극이 되고 시너지가 생기고 좀 더 열심히 하면서 꿈을 꿀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캐나다 팝펑크 밴드인 썸 41(Sum 41)의 오랜 팬이고, 퀸이나 비틀스 등 영국 밴드들도 좋아한다는 김태한은 “그래도 클래식 음악을 가장 많이 듣고 좋아한다”며 웃었다.

전설적인 바리톤 에토레 바스티아니니의 추종자이기도 한 그는 현재 가곡에 대한 관심이 커져서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를 많이 듣는다고 했다. 꼭 해보고 싶은 배역은 ‘세비야의 이발사’ 중 피가로.

"바리톤에게 꿈 같은 배역이지만 아직까지는 많이 높다는 판단이다. 나이가 차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오페라 무대에 서고 싶다는 그는 9월부터 베를린 슈타츠오퍼 오페라 스튜디오에서 활동하며 천천히 커리어를 쌓아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김태한은 이번 대회 2,3위 수상자와 함께 9월 부산KNN방송오케스트라·서귀포예술의전당·노원문화예술회관·대구아양문화센터·세종예술의전당·경주예술의전당·고양아람누리에서 총 7회의 공연을 갖는다. 11월에는 대구오페라하우스 20주년 기념 오페라 어워드 갈라 콘서트에도 출연한다. DMZ음악제 폐막 공연으로 정명훈이 지휘하는 KBS교향악단과도 협연할 예정이다.


브뤼셀=류태형 객원기자·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ryu.tae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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