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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이슈 시위와 파업

[특파원칼럼/김기용]中 베이징대 ‘反공산당’ 1인 시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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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 청년실업률 속 최고 명문대서 피켓 들어

작년 ‘쓰퉁차오 현수막’ 이후 ‘백지 시위’ 연상

동아일보

김기용 베이징 특파원


중국 최고 명문 베이징대 학생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이 대학이 자유와 민주를 위해 싸운 경험이 있다는 자부심을 은근히 드러낼 때가 있다. 많은 베이징대 학생들이 1989년 6월 4일 벌어진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시위 선봉에 섰다는 의미일 것이다. 몇몇 베이징대 교수들은 중국공산당의 살벌한 감시 아래서도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들며 비판과 저항정신이 이 대학에 깃들어 있다는 취지로 발언할 때도 있다고 한다. 물론 ‘6·4’나, ‘톈안먼’ 같은 단어는 절대 꺼내지 않는다. 그만큼 중국공산당의 감시와 통제가 무섭기 때문일 터다.

베이징대 학생들에게 지난해 10월 학교 인근 고가도로 쓰퉁차오(四通橋)에 내걸린 현수막은 어쩌면 ‘각성’의 계기가 됐을지도 모른다. 당시는 3년째 계속된 강력한 ‘제로 코로나’ 정책 피로감이 절정에 달할 무렵이었다. 그 현수막에는 공산당과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을 비판하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야말로 목숨을 내건 사건이었다. 중국 공안에 체포된 현수막 사건 주동자가 누구인지, 이후 어디로 보내져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알려진 바는 전혀 없다. 사망설도 나돌았다.

쓰퉁차오 현수막 사건 한 달쯤 뒤인 11월 말 중국 전역에서는 대학생 중심으로 공산당에 항의하는 ‘백지 시위’가 벌어졌다. 대학생들이 “백지에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준다”는 의미로 빈 A4 용지를 들고 당의 검열과 통제에 무언의 저항을 한 것이었다. 베이징대에서도 일부 백지 시위 움직임이 있었다. 당시 시위에는 “공산당 퇴진, 시진핑 퇴진” 구호까지 등장했다. 중국에서 이런 구호가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뉴스였다.

중국공산당 체제를 위협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일부 나왔지만 백지 시위는 이틀 만에 소강 상태로 접어들며 마무리됐다. 강력한 진압과 제로 코로나 정책 폐지라는 강온 양면책이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 주석의 핵심 정책이던 제로 코로나 정책이 전격 폐지된 것은 이 시위에 참여한 대학생들에게 ‘승리’로 인식됐을 것이다. 쓰퉁차오 현수막이 백지 시위를 촉발했다는 직접 증거는 없지만 두 사건 사이에 상당한 상관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개연성이 있다.

그로부터 7개월여 뒤인 이달 22일 베이징대 교내에서 한 남성이 ‘일당 독재 폐지’라고 적은 피켓을 들고 중국공산당에 반대하는 1인 시위를 벌였다. 이 남성 옆 기둥에는 ‘민주혁명 시동(始動)’이라고 적힌 피켓이 세워져 있었다. 쓰퉁차오 현수막 내용 못지않게 수위가 높았다. 이 남성은 곧바로 공안에 체포됐고 역시 이후 상황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최근 중국에서는 청년실업률(16∼24세)이 20.8%(5월 기준)로 역대 최악을 기록하며 젊은이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을 농촌으로 보내 일하게 하는 방식으로 실업률을 낮추려 안간힘을 쓰지만 청년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에는 역부족이다.

개혁개방 물결 속에 자본주의 ‘단맛’을 경험한 중국에서 일당 독재가 유지되는 것은 공산당이 이뤄낸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 때문이다. 하지만 고도성장 신화가 깨지는 순간 바로 체제에 대한 불만이 피어오른다. 중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탕핑(躺平·똑바로 드러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기)’ 현상 등이 퍼지는 것도 그 불만의 연장선에 있다.

이런 와중에 베이징대 교내에서 발생한 공산당 반대 1인 시위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또 한 사람이 목숨을 걸었다는 얘기다. 그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지켜볼 일이다.

김기용 베이징 특파원 k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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