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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이슈 '미중 무역' 갈등과 협상

‘2008년 환율전쟁 참전’ OB의 경고…“긴축 후유증 놔두면 日버블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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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 명예기자 리포트]
긴축 후유증 관리 위해 배드뱅크 설립 검토해야
과거 긴축 마무리되면 대규모 머니 무브 발생
부채 구조조정·대체투자자산 모니터링 강화해야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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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10월 대한민국 경주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 미국 대표로 참석한 밴 버냉키 당시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의장은 충격적인 발언을 쏟아냈다. 제로금리 정책을 계속할 것이며 6000억달러 규모의 2차 양적완화를 시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제로금리와 양적완화가 비전통적(unconventional)이고 일시적(temporary)인 조치라는 통념을 넘어선 것이다. 일부 국가들이 미국 달러의 인위적인 환율 절하라는 비판을 제기했으나 미국은 자국 경제가 잘못되면 세계 경제가 잘못된다는 논리로 밀어붙였고 결국 동의를 얻어냈다. 이로써 제로금리와 양적완화는 각국이 위기에 대처하는 통상적인 수단이 됐다.

◆ 출구전략 진행 중 터진 코로나 펜데믹

제로금리와 양적완화 덕분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공황이 아닌 단기간의 침체 정도로 마무리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이후 경제가 안정되면서 시중에 풀렸던 유동성을 조절하는 긴축정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2014년 1월부터 양적완화 순증 규모를 축소하는 ‘테이퍼링(tapering)’을 시행했고 2017년 11월부터는 양적완화 규모 자체를 조금씩 줄여나가는 ‘양적긴축(QT)’를 추진하고 있었다. 기준 금리는 2015년 12월까지 제로금리를 유지하다가 점진적으로 인상해 코로나 펜데믹 직전인 2020년 초에는 1.75%(상단 기준) 수준이었다. 긴축 과정의 중간쯤에서 터진 코로나 팬데믹 사태는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출구전략을 완전히 원점으로 되돌려 놓았다.

코로나 팬데믹이 터지자 연준은 ‘플레이북(playbook)’에 따라 통상적인 정책이 된 제로금리와 양적완화를 다시 시행했다. 한국도 2008년 선례를 따라 600억 달러 상당의 한미 통화스와프를 체결해 외환시장 안정을 기할 수 있었다. 경제가 안정되면서 점진적인 출구전략을 모색하던 제롬 파월의 연준은 2022년 3월 인플레이션율이 급등한 것으로 나오자 공격적으로 금리 인상에 나서기 시작했다. 파월과 버냉키의 위기 대처 방안은 거의 같았지만 긴축 정책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였다. 파월은 양적완화 축소보다는 금리인상에 중점을 둔 것이다. 본격적인 긴축 선언을 한 2022년 3월 이후 기준금리는 5%포인트 인상했으나 연준 대차대조표상 자산 규모는 2022년 4월의 정점 대비 소폭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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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상의 긴축 종료...후유증 나타날 조짐

연준이 7월 말 기준금리 상단을 5.50%로 0.25%포인트 인상했지만 시장에서는 사실상 금리인상 종결로 받아들이고 있다. 금리 인상에도 불구하고 당일 주식, 채권 시장은 모두 강세를 보였다. 파월 의장은 향후 인상 가능성을 열어놓았으나 시장에서는 사실상 금리 인상의 종결로 받아들인 것이다. 과거 사례로 볼 때 긴축 종료 이후에는 큰 폭의 ‘머니 무브’가 일어나곤 했다. 긴축 기조로 움추렸던 투자자들이 자신들의 포트폴리오를 추가로 확대하고 조정하기 때문이다. 긴축 종료를 예상한 발빠른 투자자들은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모펀드 업계의 선두 주자인 블랙스톤은 목표보다 3년이나 앞당겨 지난 6월 말 운용자산을 1조 달러로 늘렸다. 아울러 일부 리스크가 커진 상업용 부동산 투자 펀드는 내용을 재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긴축이 종료되고 머니 무브가 활발해진다고 경제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고강도 긴축이 남긴 후유증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에 금리를 많이 올렸기 때문에 그 영향이 중첩돼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1∼2년간 긴축 후유증을 어떻게 잘 관리하는가에 우리 경제의 앞날이 달려있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의 일본 사례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일본은행은 뛰는 부동산 가격 등을 잡기 위해 1988년 9월에 2.50%이던 기준금리를 1990년 12월 6.0%까지 올렸다. 1989년엔 3%의 소비세도 신설했다. 그러나 자산 버블이 갑자기 꺼지면서 일본 경제의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됐다. 긴축 후유증을 관리하지 못한 결과다. 공적자금 투입, 금융기업 구조조정, 부실채권 정리 등과 같은 정부의 적극적인 조치가 있었다면 충분히 방어할 수 있었다. 긴축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긴축 ‘후유증’에 대한 관리가 잘못된 것이었다.

◆ 부실자산 처리 위한 배드뱅크 설립 검토를

대한상공회의소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1600여개 상장사의 이자 비용은 고금리 영향으로 30% 이상 늘었다. 취약차주 대출은 규모와 함께 연체율도 동반 상승하고 있다. 지난 1분기 말 취약차주 대출잔액은 94조8000억 원으로 1년 전에 비해 1조2000억원 증가했다. 금융회사들은 일부 자산의 부실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금융권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잔액은 3월 말 현재 131조원으로 연체율은 2%로 나타났다. 이 중 증권사의 부동산 PF의 연체율은 16%에 달해 자칫 금융 불안의 뇌관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고금리 시대에 차입금이 많은 기업은 살아남기 힘들다. 업종 특성상 높은 부채비율을 갖고 있는 해운, 항공, 물류 관련 기업이나 한계 기업에 대하여는 정부와 주거래 은행이 사업구조 개선, 자산 매각, 채무 재조정 등의 선제적 구조조정 노력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 우선 상징적인 조치로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합병과 HMM(옛 현대상선) 매각을 조속히 마무리해야 한다. 금융연구원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말 신용등급 C등급 이하의 부실징후 기업은 185개로 전년보다 25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 펜데믹 이후 다소 소홀해진 정부·채권단의 구조조정 유도 노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실 자산이나 부실 채권을 소화할 수 있는 ‘배드뱅크(bad bank)’ 설립도 고려할 만하다. 아울러 국회는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의 재입법’을 추진하여 채권단 위주의 신속한 정상화 노력을 지원해야 한다.

◆ 해외 부동산 등 대체투자 부실화 대비해야

국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우려와 함께 해외 상업용 부동산 투자가 새로운 리스크 요인으로 등장했다. 국내 금융시장의 미성숙으로 장기투자 기회가 없는 상태에서 해외 부동산 투자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공실률이 높아지면서 일부 대체자산의 투자 손실이 현실화되고 있다. 현재 금융감독원은 전체 금융권에 대해 대체투자 현황을 점검하고 있다. 점검 결과가 나오면 전면 공개를 원칙으로 하고 대체투자 자산의 가격 변동 상황을 상시 모니터링하는 대응 체계를 갖춰야 한다. 시장의 조그마한 불씨가 큰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중 채무자나 신용등급이 낮은 취약 계층은 금리 부담으로 큰 고통을 겪는다. 그나마 긴축 상황에서는 자금 지원을 받을 기회도 사라진다. 최근 시중 금리가 상승하자 대부업체들은 사실상 영업을 중단했다. 취약계층 지원은 금융시스템의 안정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최근 정부가 취약계층에 대해 파격적인 지원 조건을 담은 ‘새출발기금’을 발족했다. 과거 정부의 ‘미소금융’, ‘국민행복기금’, ‘햇살론’ 등과 성격이 유사하다. 정권에 관계없이 일관되게 추진하기 위해선 법제화가 필요하다. 재원은 신용보증기금 등과 같이 재정, 한국은행, 금융기관 출연 등으로 구성하면 된다.

일본은 긴축 후유증을 여러 이유로 손 놓고 있다가 ‘잃어버린 20년’의 침체를 겪었다. 긴축이 종료돼 대규모 머니 무브가 진행되면 투자자들은 가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시장을 찾아다닐 것이다. 우리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가 찾아 왔다. 긴축의 후유증은 있으나 과거 두 번의 위기를 극복한 우리에게는 충분히 관리 가능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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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제윤 전 금융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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