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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아버지와 그를 돌보는 딸…‘더 파더’ 전무송·전현아 부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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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달 10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치매 아버지 시선으로…부녀간 화해 다뤄

헤럴드경제

‘연극인 가족’인 전무송(82)· 전현아(52)가 20년 만에 ‘부녀’로 다시 만났다. ‘더 파더(THE FATHER)’는 치매로 기억을 지워가는 아버지 ‘앙드레’와 그를 돌보는 딸 ‘안느’의 이야기를 담는다. [스튜디오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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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길을 잃은 황망한 눈동자가 허공을 더듬거린다. 사라져가는 기억을 붙잡으려는 듯, 지나쳐가는 오늘을 기억하려는 듯. 깊고 검은 눈엔 금세 당혹스러운 기색이 어린다. “지금 몇 시야?” 돌아오는 답은 늘 같다. “약 먹을 시간이요.”

아버지는 자꾸만 변해갔다. 아끼던 손목시계가 사라졌다며 간병인을 의심하고, 헌신적인 딸에겐 종종 화를 냈다. 아버지도 이 상황이 미칠 듯 두렵다. 그는 함께여도 혼자였고, 오늘을 살면서도 오늘이 없었다. ‘연극인 가족’인 전무송(82)· 전현아(52)가 20년 만에 ‘부녀’로 다시 만난 ‘더 파더(THE FATHER)’(10월 1일까지·세종문화회관 S씨어터)다. 연극은 치매로 기억을 지워가는 아버지 ‘앙드레’와 그를 돌보는 딸 ‘안느’의 이야기를 담는다.

“안느와 닮은 점이요? 아버지를 극진히 생각한다는 거? (웃음)” 애지중지하는 딸의 이야기에 아버지는 내심 좋으면서도 괜히 한 소리를 해본다.

“에이, 난 못 믿어. 연습 끝날 때마다 어찌나 야단하는지.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니잖아’ 그런다고. 얘는 우리 마누라하고 똑같아.” (전무송)

아버지의 이야기에 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는 “연극에선 권위적인 아버지이지만, 실제론 딸바보”라고 했다. 정말로 그랬다. “얘가 시집갈 때 3일은 울었어요.” (전무송)

2003년 연극 ‘당신, 안녕’(윤대성 극작) 이후 오랜만에 부녀로 마주한 무대다. ‘더 파더’는 배우 앤서니 홉킨스에게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안긴 동명의 영화(2020)로도 잘 알려진 작품이다. 한국에선 2016년 국립극단에서 박근형 주연의 ‘아버지’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올랐다. 이번엔 ‘스튜디오 반’이 제작하고, 이강선이 연출을 맡았다.

요즘 부녀는 온종일 함께 지낸다. 한 집에 살면서 매일 함께 출근해 연기 호흡을 맞추고, 매일 같은 시간 퇴근해 집으로 향한다. 최근 서울 대학로의 연습실에서 연극인 부녀를 만났다. 미소가 떠나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애틋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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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전무송과 ‘더 파더(THE FATHER)’로 한 무대에 서는 딸 전현아는 “연습을 하면서도 연기와 실제 마음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마음이 너무 아파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스튜디오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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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에서의 ‘운명같은 만남’…딸에겐 ‘눈물 버튼’전무송이 연극의 대본을 받은 것은 올 봄이었다. ‘운명같은 만남’이라고 그는 떠올렸다. 주인공은 ‘치매 노인’이었다. “나와 같은 병자”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아파서 병원에 다니고 있을 때였어요. 이렇게 치료를 받으며, 이젠 끝났나 보다 하는 절망에 빠졌을 때, 대본이 오더라고요. 여기서 쓰러지면 안되는데, 이제 일어나야지 싶더라고. 정말 운명이지.” (전무송)

‘절망의 끝’에 찾아온 연극 한 편은 노장 배우를 다시 일으켰다. 그를 다시 살게 한 작품이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휘청거리기 일쑤였는데, 기적처럼 기력이 회복됐다. 딸과 아내는 “그까짓 거 왜 못하냐”며 ‘연극 정신’을 부추겼다. 그는 1962년 유치진의 드라마센터에 입학하며 연기를 시작했다.

“연극이 뭔지 몰랐던 그 시절엔 허영이 있었어요. 예술가는 무대 위에서 쓰러져야 한다고 하는데, 이게 그런 작품이에요. 이제 이거 하고 죽어야지 (웃음)” (전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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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무송은 병상에 있을 때 ‘더 파더’의 대본을 받았다. 작품은 그를 다시 살게 했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휘청거리기 일쑤였는데, 기적처럼 기력이 회복됐다. 딸과 아내는 “그까짓 거 왜 못하냐”며 ‘연극 정신’을 부추겼다. [스튜디오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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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최근 사회 문제로 대두된 치매를 소재로 가져왔다. 조금은 복잡하다. 현실과 망상, 진실과 거짓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어지럽게 흩어진 퍼즐 조각을 맞추려 하면, 기억의 단상들은 다시 엉키며 소름 돋는 기계음과 함께 장면이 전환된다. 연극이 시점이 독특해서다. 대부분 치매를 다룬 작품은 환자를 간호하는 간병인의 고통과 갈등을 다룬다면, ‘더 파더’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그려진다. 연극이 이해하기 힘든 ‘미스터리 스릴러’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전현아는 “연습을 하면서도 연기와 실제 마음이 끊임없이 충돌한다”고 말했다.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는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은 고통에 산다. 헌신을 다하다가도 속수무책인 상황에 몸부림친다.

“안느의 입장으로 연기를 해야 하는데, 실제의 제 역할과 겹쳐져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아빠’라고 부르는 몇몇 장면들은 제어가 되지 않아 울컥하고 하염없이 눈물이 나기도 해요.” (전현아) 결국 이강선 연출은 전현아에게 “안느는 울면 안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시선에 담긴 세상과 관계는 때때로 폭력적이다. “귀여운 우리 아빠”라며 다정하게 불러주던 딸은 언젠가부터 단호하고 모진 말들을 뱉는다. 주변엔 그를 ‘망령난 늙은이’로 대하는 사람들로 그득하다. ‘기억’을 증명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버지가 바라보는 세상과 관계엔 간절함과 공포가 뒤섞인다.

전무송은 작품에 대해 “치매를 힘든 병이라 생각하는데, 그것은 우리 삶의 연장선 상에서 겪는 하나의 일”이라며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이 순간을 인정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던져준다”고 말했다. 궁극적으로 연극은 ‘치매’라는 소재를 통해 딸과 아빠의 관계 회복과 용서, 화합을 그려간다. “존엄성을 잃지 않는 한 인간의 이야기”라는 것이 딸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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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인 가족’인 전무송· 전현아가 20년 만에 ‘부녀’로 다시 만났다. ‘더 파더(THE FATHER)’는 치매로 기억을 지워가는 아버지 ‘앙드레’와 그를 돌보는 딸 ‘안느’의 이야기를 담는다. [스튜디오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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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지 않아도 닮아가는 부녀…“연극은 삶 자체”60여년간 한 길을 걸어온 전무송에게 “연극은 삶 자체”다. 그는 “우리가 몰랐던 것들, 가지고 있어도 무엇인지 모르는 것들이 연극 안에 있다”며 “인생의 희노애락과 모든 갈등, 관계 등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 “애비처럼 고생한다”며 딸이 연극을 하겠다는 것을 반대했었다. 국악고에서 가야금을 전공했던 딸의 연기 선언엔 대뜸 한숨이 지어졌다. 그 역시 운명이었는지, 이젠 같은 길을 걷는 든든한 동료가 됐다. ‘아버지와 딸’의 ‘연기 경력’은 둘이 합쳐 91년(전무송 61년, 전현아 30년). 딸 전현아를 비롯해 아들 전진우(48)도, 며느리 김미림(38)도, 사위 김진만(54)도 모두 연극 배우다.

“결국 하려면 하라고 했어요. 단, 스타가 될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죠. 스타는 아무나 되는게 아니니까. 연극을 학문으로 하거나, 학문까진 아니라도 올바르게 인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생각이라면 하라고 했어요.” (전무송)

단 한 번도 배워본 적은 없지만, 딸의 연기는 아버지를 닮았다. 작고한 연극배우 강태기는 전현아에게 “아버지한테 그만 좀 배우라”고 할 정도였다. 말투, 제스처, 억양까지 닮아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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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무송(82)· 전현아(52) 부녀가 20년 만에 무대에서 ‘부녀’로 다시 만났다. ‘더 파더(THE FATHER)’를 통해서다. [스튜디오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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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한테 한 번도 연기 지도를 받은 적이 없어요. 워낙 어릴 때부터 아빠가 공연하는 걸 봐서, 은연 중에 배웠나봐요. ‘상당한 가족’이라는 연극을 할 땐 연출한 남편이 깔깔 대고 웃더라고요. 아버지, 딸, 아들 세 사람이 턴을 하는데 다 똑같다고요.” 아버지와 딸은 곧 영화도 함께 한다.

아버지를 그림자처럼 지켜보던 딸은 아버지의 배우론을 석사 논문으로 썼다. 그는 “늘 뒷주머니에 접혀 있는 아빠의 낡은 대본을 많이 봤다”며 “언제나 대본에 빼곡하게 적으며 공부한다”고 말했다. ‘더 파더’ 대본 역시 마찬가지다. 수험생처럼 형광펜으로 중요 표시를 했고, 대본에 담기지 않은 지문과 감정들을 꼼꼼히 적어 넣었다.

“내 연기는 머리 나쁜 사람의 작업과 같아요. 제대로 보고, 듣고, 생각해서 표현해야 연기가 완성돼요. 훌륭한 배우가 되려면 제대로 해야죠. 그게 연기론이지 뭐. 허허.” (전무송)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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