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직장인 A씨는 지난해 전 직장에서 대표에게 직장 내 성희롱·성추행을 당하고 퇴사했다. A씨는 노동청과 경찰에 대표를 신고했다. 검찰은 대표에게 죄가 있다고 보고 대표를 약식기소(정식재판 대신 서면재판으로 벌금형을 내려달라는 청구)했지만, 대표가 이에 불복해 정식재판을 요구하면서 법적 다툼이 길어졌다.
A씨는 법률·노무상담조차 받지 못한 채 극심한 스트레스에 내몰렸다. 사면초가에 빠진 A씨는 주변에 묻고 물어 여성단체가 운영하는 ‘고용평등상담실’을 찾았다. 상담실은 대응방법과 법률자문, 정신적 피해에 대한 치유프로그램을 지원했다. A씨는 상담실의 도움으로 일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A씨는 “트라우마로 재기를 꿈꾸지 못했지만 고용평등상담실의 지속적 상담과 지지 속에 용기를 얻었고, 새 일자리도 구해서 누구보다 긍정적이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20대 회사원이 됐다”며 “상담실을 없애지 말아 달라. 피해자의 마음 헤아려주는 사회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했다.
정부 지원 중단…“최후의 보루 없애다니”
정부가 직장 내 성희롱·성차별 피해 여성 노동자들을 돕는 고용평등상담실 지원을 중단했다. 상담실 관계자들과 상담 경험자들은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모두 놓아버린 것”이라며 예산 복구와 사업 지속을 요구했다.
전국 19개 고용평등상담실로 구성된 ‘전국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와 197개 시민사회단체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고용평등상담실 폐지 규탄’ 기자회견을 열어 이같이 밝혔다.
전국 19개 고용평등상담실 관계자들로 이뤄진 ‘전국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 회원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이 25일 오전 11시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24년간 여성노동자를 지켜온 고용평등상담실 폐지, 퇴행하는 고용노동부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조해람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고용평등상담실은 2000년부터 직장 내 성희롱·성차별 등 피해를 본 여성 노동자들을 도와 왔다. 연평균 7640건의 상담을 진행했다. 고용평등상담실은 노동청 등에서 권리구제를 제대로 받지 못한 여성 노동자가 찾는 ‘최후의 보루’였다. 취약한 환경에 내몰린 여성 노동자들의 상담·법률지원·서비스 연계 등을 맡았다. 특히 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나 프리랜서 등 기존 노동법 적용을 받기 어려운 이들이 큰 도움을 받았다.
고용노동부는 2024년 예산안에서 고용평등상담실 예산 지원을 중단하고 관련 예산을 12억1500만원에서 5억5100만원으로 54.7% 삭감했다. 상담실이 제공하던 상담·권리구제 서비스는 정부가 직접 운영하기로 했다.
고용평등상담실 관계자들로 구성된 전국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는 “복잡해지는 고용관계, 여성 노동자의 젠더의식은 성장했지만 달라지지 않는 성차별적 위계의 직장문화 속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며 “고용평등상담실은 다른 여러 상담실을 거쳐도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문제를 가진 여성노동자가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라고 했다.
전국 19개 고용평등상담실 관계자들로 이뤄진 ‘전국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 회원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이 25일 오전 11시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24년간 여성노동자를 지켜온 고용평등상담실 폐지, 퇴행하는 고용노동부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조해람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김예민 대구여성회 대표는 “상담실은 기본 1시간 이상 상담을 제공하고, 내담자들은 상담 후 ‘들어주셔서 감사하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며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일종의 한풀이”라고 했다. 김 대표는 이어 “최후의 보루라는 말은 진실이고 전혀 과장이 아니다”라며 “성희롱과 성차별 등 여성 노동자를 위한 전문 상담을 제공할 수 있는 기관은 우리가 유일하다”고 했다.
상담을 경험한 내담자들도 고용평등상담실을 유지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병원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해 퇴사한 B씨는 “노조도 의논할 곳도 없어서 포기하다가 고용평등상담실을 알게 됐는데, 내 일처럼 공감해주고 대응방법을 알기 쉽게 알려줘서 병원에 괴롭힘 고충 진정을 넣었다”며 “직장 내 괴롭힘이 인정돼 실업급여를 받아 몸과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고 했다.
B씨는 “어디를 찾아가야 할지 막막한 여성 노동자들은 쉽게 자포자기하고, 법적대응을 하면 회사는 변호사나 노무사를 써서 대응한다”며 “이때 전화 한 통으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곳이 고용평등상담실”이라고 했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 C씨는 “고용평등상담실이 없었으면 억울하고 답답한 채 일자리도 잃고 권리구제도 못 받은 채 고통받았을 것”이라며 “약자들을 위한 고용노동부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일로 약자를 위한 노동부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전국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는 “이대로라면 사회 약자들이 기댈 곳은 모두 사라진다”며 “행정부가 기능을 상실했다면 국회가 되돌려놓아야 한다. 국회는 여성 노동자가 안전하게 노동하고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요청한다”고 했다.
▼ 조해람 기자 lennon@khan.kr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 무슨 옷 입고 일할까? 숨어 있는 ‘작업복을 찾아라
▶ 뉴스 남들보다 깊게 보려면? 점선면을 구독하세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