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04 (수)

이슈 불법촬영 등 젠더 폭력

'경미한 스토킹'도 스토킹이다, '위험성' 주목한 대법 첫 판단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예섭 기자(ghin2800@pressian.com)]
연이은 스토킹 살인사건에 "사법기관이 살인 등 스토킹 강력범죄의 징조를 간과하고 있다"는 지적이 일어온 가운데, 경미한 행동이라도 처벌 가능한 스토킹 범죄에 해당할 수 있다는 대법원의 첫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전 부인을 대상으로 한 스토킹 처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징역 10개월과 스토킹 치료 프로그램 이수 40시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20일 밝혔다.

A씨는 기소된 6가지 스토킹 행위 중 비교적 경미한 행위였던 4가지 행위에 대해 '(피해자에게) 불안감·공포심을 일으킬 만한 행위가 아니었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개별 행위가 비교적 경미하더라도 누적·반복된 행위로 불안감·공포심을 일으키기 충분하다면 전체를 묶어 유죄로 인정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스토킹 행위의 범죄성을 기존보다 폭넓게 인정한 셈이다.

A씨는 지난해 10월 15일부터 전 부인 B씨의 집에 찾아가 한 달가량 6회에 걸친 스토킹 행위를 지속해 기소됐다. 구체적인 행위를 살펴보면 A씨는 △B씨 집 앞에서 B씨와 자녀를 기다리거나 △현관문을 발로 찼고 △집에 자녀들만 있는 상황에 문을 열어달라고 해 집 안으로 들어갔으며 △현관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거나 △집 앞마당에 드러눕는 등의 행위를 했다.

A씨는 지난 2009년 B씨와 결혼했으나 가정폭력 등의 사유로 2017년 이혼했다. 이후 2021년 3월에는 A씨가 B씨를 성폭행, B씨가 A씨를 상대로 접근금지명령을 신청한 상태였다. 검찰은 A씨가 이 같은 접근금지명령을 위반해 스토킹 행위를 함으로써 B씨로 하여금 불안감과 공포심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지난 1심이 A씨가 행사한 6회의 혐의를 모두 스토킹 범죄 행위로 판단해 유죄를 선고하자, A씨는 6개 행위 중 2개 행위에 대해서는 스토킹이 맞다고 인정하면서도 다른 4개 행위에 대해서는 '(피해자에게) 실제로 불안감이나 공포심을 일으켰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문을 두드리거나 전 부인과 자녀를 기다리는 등의 비교적 경미한 행위에 대한 주장이었다.

2심은 A씨의 주장을 기각했다. 재판부는 A씨의 행위 중 상대적으로 '경미한 행위'에 해당하는 행위들 또한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면 상대방이 현실적으로 이를 느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스토킹행위에 해당"하며 "이를 지속적 또는 반복적으로 하면 스토킹 범죄를 구성한다"고 봤다.

스토킹 범죄 성립 요건을 '실제로 불안감·공포심을 일으켰는가'(침해범)를 넘어 '불안감과 공포심의 위험을 야기했는가'(위험범)에 주목하여 적용한 것이다. 재판부는 특히 △스토킹처벌법의 제정 목표가 '초기 스토킹 행위'를 막아 폭행·살인 등 강력범죄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는 점 △미수범에 대한 처벌 규정이 따로 없다는 점 등을 '위험범' 해석의 근거로 들었다.

A씨는 상고했지만, 대법원 또한 2심의 이 같은 논리를 수용해 원심을 확정했다. 피해자 B씨가 경찰에게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표하며 일부 행위의 경미함은 대법원에서도 인정됐다. 다만 대법원은 그럼에도 A씨의 행위가 비교적 경미한 행위(4가지)뿐만 아니라 스토킹 범죄성을 스스로 인정한 행위(2가지)까지 나아갔다는 점에서 '(A씨의 행위로 인해 B씨의) 불안감·공포심이 비약적으로 증폭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가-피해자 간의) 관계·지위·성향, 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 행위자와 상대방의 언동, 주변의 상황 등 행위 전후의 여러 사정을 종합해 객관적으로 판단"해 스토킹 범죄 성립의 '충분정도'를 따져야 한다고 제시했다.

대법원의 이번 판단으로 사법기관이 그간 여성계 등지에서 이어진 '사법기관이 스토킹 범죄의 위험성을 과소 해석하고 있다'는 지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될지 기대가 모아진다.

지난해 9월 발생한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에 이어 올해 7월에도 인천 스토킹 살해사건이 일어나는 등 스토킹에 따른 여성 살해 사건이 연이으면서, 피해자 지원단체 등 현장에선 '피해자 보호를 위해선 사법기관의 태도가 변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라 왔다. (관련기사 ☞ '스토킹 파격조치' 장담한 한동훈, 이후 1년 "대체 뭐가 바뀌었나")

한국여성의전화는 지난 18일 발표한 논평에서 "스토킹처벌법 시행 후 1~3심 양형통계를 분석한 결과 80% 이상이 집행유예 이하의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라며 "(스토킹) 사건이 기소되어 재판에 넘어가더라도 사법부는 ‘피해자에게 직접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 및 제재의 수위를 낮추는 미온적 태도로 임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경찰청 기준 2021년 1만 4509건에서 2022년 2만 9565건으로 증가한 스토킹 신고 건수에 비해 '검거율도, 실형 선고율도 낮다'는 점은 2021년 스토킹처벌법 제정 이후 현장 단체들이 제기해온 스토킹 범죄 대응의 주요 문제점이었다. 대법 판례의 영향으로 '경미한 스토킹'에 대한 하급심들의 실형 선고율이 높아진다면 스토킹 피해자 보호가 실질적으로 개선될 여지가 있다.

관련하여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에 대해 "비교적 경미한 수준의 개별 행위더라도 누적적·포괄적으로 평가해 불안감·공포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일련의 스토킹행위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한 최초의 사안"이라며 "위험범에 관한 선례에 따르면 스토킹범죄 피해자를 보다 두텁게 보호할 수 있게 한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프레시안

▲지난 9월 11일 오전 서울지하철6호선 신당역 10번 출구 인근에 마련된 추모공간. 누군가가 '죽지 않고 일하고 싶다'는 내용의 추모 메시지를 붙여놓았다. ⓒ프레시안(한예섭)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예섭 기자(ghin2800@pressian.com)]

- Copyrights ©PRESSian.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